나를 아프게 하는 것이 나를 강하게 만든다. 알렉상드로 줄리앙

꽃이 피어나기에 꽃이 피어날 뿐입니다. 자기를 걱정하지 않으며, '내가 잘 보여요?'라고 묻지 않습니다. '왜 사느냐?'는 질문에는 종종 '다른 누군가를 위해'가 개입합니다. 결국 우리는 하찮은 존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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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규 - 달밤

누가 와서 나를 부른다면

내 보여 주리라

저 얼은 들판 위에 내리는 달빛을.

얼은 들판을 걸어가는 한 그림자를

지금까지 내 생각해 온 것은 모두 무엇인가.

친구 몇몇 친구 몇몇 그들에게는

이제 내 것 가운데 그중 외로움이 아닌 길을

보여 주게 되리.

오랫동안 네 여며온 고의춤에 남은 것은 무엇인가.

두 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황동규, 「달밤」


김수영 - 그 방을 생각하며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그 방의 벽에는 싸우라 싸우라 싸우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어둠을 지키고 있을 것이다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
그렇듯이제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메말랐다
그 방의 벽은 나의 가슴이고 나의 사지일까

일하라 일하라 일하라는 말이
헛소리처럼 아직도 나의 가슴을 울리고 있지만
나는 그 노래도 그 전의 노래도 함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 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김수영, 「그 방을 생각하며」,1960.10


이성부 - 누룩

누룩 한 덩이가
뜨는 까닭을 알겠느냐
지 혼자 무력(無力)함에 부대끼고 부대끼다가
어디 한군데로 나자빠져 있다가
알맞은 바람 만나
살며시 더운 가슴
그 사랑을 알겠느냐
 
오가는 발길들 여기 멈추어
밤새도록 우는 울음을 들었느냐
지 혼자서 찾는 길이
여럿이서도 찾는 길임을
엄동설한 칼별은 알고 있나니
무르팍 으깨져도 꽃피는 가슴
그 가슴 울림 들었느냐
 
속 깊이 쌓이는 기다림
삭고 삭아 부서지는 일 보았느냐

지가 죽어 썩어 문드러져
우리 고향 좋은 물 만나면
덩달아서 함께 끓는 마음을 알겠느냐
춤도 되고 기쁨도 되고
해 솟는 얼굴도 되는 죽음을 알겠느냐

아 지금 감춰 둔 누룩 뜨나니
냄새 퍼지나니

- 이성부,  '누룩'



이육사 - 꽃

동방은 하늘도 다 끝나고
비 한 방울 내리잖는 그 땅에도
오히려 꽃은 빨갛게 피지 않는가
내 목숨을 꾸며 쉬임 없는 날이여

북쪽 툰드라에도 찬 새벽은
눈 속 깊이 꽃 맹아리가 옴작거려
제비 떼 까맣게 날아오길 기다리나니
마침내 저버리지 못할 약속이여!

한 바다 복판 용솟음치는 곳
바람결 따라 타오르는 꽃성(城)에는
나비처럼 취하는 회상의 무리들아
오늘 내 여기서 너를 불러 보노라

-이육사, '꽃'



박재삼 - 정릉 살면서

솔잎 사이사이
아주 빗질이 잘된 바람이
내 뇌혈관에 새로 닿아 와서는
그동안 허술했던
목숨의 운영을 잘해 보라 일러 주고 있고…

살 끝에는 온통
금싸라기 햇빛이
내 잘못 살아온 서른여섯 해를
덮어서 쓰다듬어 주고 있고…

그뿐인가,
시름으로 고인
내 간장(肝臟) 안 웅덩이를
세월의 동생 실개천이
말갛게 씻어 주며 흐르고 있고…

친구여,
사람들이 돌아보지도 않는
이 눈물 나게 넘치는 자산(資産)을
혼자 아껴서 곱게 가지리로다.

​-박재삼, '정릉 살면서'



김기림 - 연륜(年輪)

무너지는 꽃 이파리처럼
휘날려 발 아래 깔리는
서른 나문 해야.

구름같이 피려던 뜻은 날로 굳어
한 금 두 금 곱다랗게 감기는 연륜(年輪)

갈매기처럼 꼬리 떨며
산호(珊瑚) 핀 바다 바다에 나려앉은 섬으로 가자.

비췻빛 하늘 아래 피는 꽃은 맑기도 하리라.
무너질 적에는 눈빛 파도에 적시우리.

초라한 경력을 육지에 막은 다음
주름 잡히는 연륜(年輪)마저 끊어 버리고
나도 또한 불꽃처럼 열렬히 살리라.

-김기림, '연륜(年輪)'




김광균 - 와사등(瓦斯燈)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 있다
내 호올로 어디로 가라는 슬픈 신호(信號)냐

긴- 여름 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墓石) 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夜景) 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皮膚)의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선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悲哀)를 지고 왔기에
길-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김광균, '와사등(瓦斯燈)'



구상 - 초토의 시

판잣집 유리딱지에
아이들 얼굴이
불타는 해바라기마냥 걸려 있다.

내려쪼이던 햇발이 눈부시어 돌아선다.
나도 돌아선다.
울상이 된
그림자 나의 뒤를 따른다

어느 접어든 골목에서 걸음을 멈춘다.
잿더미가 소복한 울타리에
개나리가 망울졌다.

저기 언덕을 내려 달리는
소녀의 미소엔 앞니가 빠져
죄 하나도 없다.

나는 술 취한 듯 흥그러워진다.
그림자 
웃으며 앞장을 선다.

- 구상, '초토의 시'




정지용 - 오월 소식

梧桐나무 꽃으로 불밝힌 이곳 첫여름이 그립지 아니한가?
어린 나그내 꿈이 시시로 파랑새가 되여오려니.
나무 밑으로 가나 책상 턱에 이마를 고일 때나,
네가 남기고 간 記憶만이 소근 소근거리는구나.

모초롬만에 날러온 소식에 반가운 마음이 울렁거리여
가여운 글자마다 먼 黃海가 남설거리나니.

......나는 갈메기 같은 종선을 한창 치달리고 있다......

快活한 五月넥타이가 내처 난데없는 順風이 되여,
하늘과 딱닿은 푸른 물결우에 솟은,
외따른 섬 로만팈를 찾어 갈가나.

일본말과 아라비아 글씨를 아르키러간
쬐그만 이 페스탈로치야, 꾀꼬리 같은 선생님 이야,
날마나 밤마다 섬둘레가 근심스런 風浪에 씹히는가 하노니,
은은히 밀려 오는 듯 머얼리 우는 오ㄹ간 소리............

- 정지용. '오월 소식'



🐼 현대시

구상

김광균

김규동

김기림

김수영

박재삼

이상화

이성부

이육사

이형기

정지용

황동규





이상화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지금은 남의 땅―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끄을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가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찐 젖가슴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팔목이 시도록 매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우서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잡혔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 이상화,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개벽](192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