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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장하 외, '꽃 피는 봄이 오면' 극본 전문 듣기

꽃피는 봄이 오면

S# 1. 구청 관악반 - 오후 (비) 빈 복도. 낡은 창 밖으로 조각 풍경들이 보인다. 창에 부딪치는 빗방울들 위로 들리는 어색한 연주소리. 동네 가게 아줌마서부터, 제법 차려입은 예쁜 아줌마들까지 섞여 있는, 썰렁한 동네 구청 한 구석의 아줌마들 대상 색소폰 교습반. 비 내리는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현우. 현우 : (창 밖을 보면서.) 영재슈퍼 사모님…. 자꾸 한 박자씩 늦으시네요. 시선은 창밖에 가 있으면서도 소리로 듣고 아줌마들의 실수를 아는 현우. 현우, 아줌마 부대를 돌아보며 지휘대 쪽으로 걸어온다. 현우 : 연주라는 건, 악기와 몸을 빌려서 마음으로 연주를 하는 거예요. 연주하는 사람도 막 아름다워지고 그래야죠. 따뜻한 사랑을 상상하세요. 댁에 계시는 남편분들이나. 아줌마들 표정이 갑자기 침울해진다. 그래도 배워보겠다는 자세로 불어보는데 소리가 더 안좋다. 현우 : 아… 아니, 아니, 그럼 첫사랑을 생각해 보세요. 지금처럼 비 오는 날에 생각나는 사람 없으세요? 남편분 말고?


아줌마들 : ……. 현우 : 비 올 때 우산도 씌워주고, 비 맞으면서 기다리고, 같이 걷고…. 그러던 첫사랑의 추억 다 있으시죠? 남편분들 말구요. 아줌마들, 현우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해 보는 듯하다. 현우 : (동의를 구하는 미소를 띠고.) 자 그럼…. 그 첫사랑을 만진다고 생각하면서 손가락을 움직여보세요. “어머 어머, 못하는 소리가 없어 정말” 하면서도, 몇몇 아줌마들은 벌써 볼을 붉히며 살며시 입술을 색소폰에 가져간다. 이번엔 소리를 제법 내는 아줌마들. S# 2. 술집 - 밤 친구 경수와 마주앉아 술에 적당히 취한 현우. 경수 : 할만 해? 현우 : ……. 경수 : 잘 생각했다. 어머니 고생하시는데. 현우 : (키득키득 웃으며.) 표정은 다 장영주야. 코메디가 따로 없어. 되는 걸 해야지 되는 걸…. 경수 : 재밌겠네 뭐…. 현우 : (한숨.) … 재미없어. 그냥 아줌마들 좋아하는 얘기 대충 하면서 시간만 때우는 거지. 경수 : 그거라도 감지덕지 해. 요즘 일자리 없어서 난리들인데. 현우 : ……. 현우의 전화가 울린다. 현우는 주머니에서 전화기를 꺼내 발신번호를 잠시 보고 있더니 받지 않는다. 계속 울리는 전화. 전화 안받는 현우를 보는 경수. 경수 : (말을 아끼다가.) 좀 받아라. 넌 뭐 그렇게 죄진 게 많냐? 현우 : 됐어. 경수 : 전화 건 사람이 죽어가면서 한 거면 어쩔려구? 현우는 경수의 말에 전화번호를 한 번 더 확인하더니 현우 : 새끼, 재수 없게…. 전화벨 소리가 시끄러운지 사람들이 쳐다보기 시작한다. 전화를 들고 밖으로 나가는 현우. 현우 : (전화기를 들고.) ……. 연희 : …… 오빠? S# 3. 공터 - 밤 밤 풍경들. 어두운 화단 한구석에 퍼질러 앉아서 전화기를 만지고 있는 여자. 화장을 진하게 하고 술이 조금 취한 연희. 길가는 사람들이 쳐다보고 지나간다. 현우 : ……. 연희 : 오랜만이네. 우리 오빠. S# 4. 도로, 차 안 - 밤 늦은 밤. 차량이 뜸한 도로. 현우 : ……. 연희 : ……. 현우 : 누가 보면 술집 아가씬줄 알겠다. 연희 : 누가 나 같은 아줌마를 써주냐? 써주면 영광이지. 현우 : ……. 연희 : 남자랑 술 먹었다, 나. 자기 통장 비밀번호가 내 생일이래. 오빠랑 똑같지? (조금 웃는다.) 현우 : 그 자식 계좌번호가 어떻게 되냐? 연희 : … 착한 사람이야. 현우 : ……. 문득 현우의 얼굴에 속도감시 카메라의 하얀 불빛이 팍 터진다. 끽-! 현우는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잠시 숨을 고르며 참고 있더니 문을 열어젖히고 나간다. 연희 : (나가려는 현우를 붙잡으며.) 왜 그래? 현우 : 놔 봐…, 알았어, 놔 보라니까? 놔 봐, 글쎄. 길가의 돌을 하나 찾아 집더니 그대로 사진기를 향해 던지는 현우,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길 위로 떨어지는 파편. 반쯤은 부서진 채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카메라. 백미러를 통해 현우의 그런 짓을 걱정스럽게 보고 있는 연희. S# 5. 연희네 아파트 단지 - 늦은 밤 오래된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는 두 사람. 무슨 노래인지 모를 단순한 노랫가락을 콧노래로 흥얼대는 연희. 조금 슬픈 노랫가락. 다음 소절 생각이 안 나는지 자꾸만 같은 곳을 반복하고 있다. 듣고 있던 현우. 현우 : 하지 마, 그거. 연희 : 좋아서 하나 뭐? 우울해지면 그냥 생각나. 곡이 너무 우울해서. 이젠 잘 기억도 안 나고 자꾸 틀리네. 현우 : ……. 연희 : 그땐 우리가 참 많이 사랑했었나봐. (장난스러우면서도 장난만은 아닌.) 오빠, 한번만 불어줄래? 현우 : 욕먹어. 사람들 다 자는데. 연희 : 아 참, 우리 오빠는 함부로 아무데서나 연주 안하지…. 미안. 또 까먹었네. 현우 : 너 술을 도대체 얼마나 먹은 거야? 연희 : 나…. 현우 : …… ? 연희 : 오빠가 준 목걸이 팔아서 술 먹었어. 잠시 말이 없는 두 사람. 연희 : 미안해. 현우 : 잘했어. 그 얘기 할려고 전화한 거야? 연희 : 그냥… 나 버린 남자랑 나 좋다는 남자랑 누가 더 나은가 비교해 볼려고. 현우 : 버리긴 뭘 버려. 누가 들으면 진짠줄 알겠네. 연희 : 그럼 버린 게 아님 뭐야? 현우 : 음악만 하는 사람이랑은 못산다며. 연희 : 누가 음악하지 말래? 학원에서 애들도 가르치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잖아. 현우 : 그만 하자. 왜 또 그래. 연희는 현우의 그런 모습에 익숙한 듯 대꾸도 없이 바짝 얼굴을 들이대고 현우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본다. 현우 : ……. 연희 : 오빠두 많이 늙었다. 다행이야…. 나만 늙은 줄 알았는데. 희미한 불빛조차 없이 컴컴한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것 같은 낡은 아파트 현관. 일어나는 현우. 현우 : (연희를 보다가.) 무서우면 문 앞까지 같이 가줄까? 연희 : (허탈한 웃음이 보이는 듯.) 내가 외로워 보여? 현우 : (보다가.) ……. 돌아서 가는 현우. 연희는 현우의 뒷모습을 볼까봐 고개를 돌리고 앉아 잠시 벤치 옆의 나무를 보고 있다. 낙엽을 다 떨군 채 링겔을 하나 매달고 힘겹게 버티고 있는 나무. 현우,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면 연희는 없고 불 꺼진 아파트들 중에서 4층 작은 창에 불이 켜진다. 천천히 단지를 빠져 나오는 현우. S# 6. 현우 집 - 낮 주방 탁자 위에 놓인 낡은 라디오에서 주부대상 퀴즈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다. 라디오 :: 화곡동. … 이번에 못 맞추시면 을지로가 기회를 뺏어갑니다. 네… 그럼 정답은? 엄마 : 화개장터. 현우 : 와- 엄마 알어? 엄마 : 조영남이 맨날 부르는 게 그거잖아. 라디오 :: 화개장터~ 딩동댕~ 자, 이제 2대2 … 이삿짐을 꾸리고 있는 현우와 엄마. 엄마는 그릇들을 애 다루듯 살살 신문지에 겹겹이 싸고 있다. 무늬도 촌스런 꽃그림이 그려진 70년대풍 접시들. 현우 : 생전 가야 쓰지도 않는 걸 뭘 그렇게 싸? 그냥 버리지. 라디오 :: 마지막 문제입니다. 자, 을지로, 화곡동, 잘 들으세요. 평소에 기차 많이 타세요? 아뇨… 기차를 자주 이용하시는 분이라면 아시는 문제인데… 강원도 태백시 인근에 있으며 해발 855m에 위치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철도 역은? 어디일까요? ①승부역 ②추전역 ③사북역 ④도계역 엄마 : 나중에 다 쓸 데 있지 왜 없어. 너 장가 가두 그릇 줘야 하구. 현우 : 요즘 그런 그릇을 누가 써. 촌스럽게. 엄마 : ……. 라디오 :: …… 자, 5초 드리겠습니다. 엄마 : …… 어디니? 현우 : 도계잖아, 도계. 엄마 : ……. 라디오 :: … 을지로! … 네, 을지로… 2번 추전역!… 딩동댕… 엄마는 현우를 쳐다보고, 현우는 못 들은 척. 부엌 서랍을 여는 현우. 그 안에 별 게 다 들어있다. 약간 지저분하기까지. 서랍 안의 물건들을 꺼내어 보이는 현우. 고기 삶을 때 찍는 삼지창이 보이고, “완전 무기창고네.” 식당에서나 쓰는 뚝배기 집게가 보이고, “이건 뭐야? 무슨 순두부 집이야?” 말없이 그릇을 싸고 있는 엄마. 라디오에서 트로트 노래가 나온다. 밝은 댄스풍의 트로트. S# 7. 거리 - 밤 빤짝빤짝 임시번호판을 붙인 노란색 피아노학원 미니버스가 달리고 있다. 운전하는 경수. 그 옆 보조석에 앉은 현우. 버스 뒤에서 재잘거리는, 교복을 입은 예쁜 여학생들의 다리를 훔쳐보는 현우. 경수 : 야, 너 뭐 봐? 현우 : 쟤네들은, 지들이 다 무슨 훌륭한 연주가라도 될 줄 알고 있겠지? 경수 : … (여고생들 눈치를 보며 그냥 웃는다.) 현우 : 넌 쟤들이 다 돈으로 보이겠다? 쟤는 올 연말 휴가비, 고 옆에 애는 한달 기름값, 고 옆에 애는…. 경수 : 다 들려. 현우 : (차 내부를 둘러보며.) 차도 사고, 돈도 많이 벌고, 좋겠다. 경수 : 그러는 너는…. 현우 : 나? 나 뭐? 난 아직 꿈이 있잖냐. 경수 : 꿈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꿈? 무슨 꿈? 돈 많은 과부 꿈? 오케스트라에서 너 같은 중늙은이를 누가 써주냐?… 지금까지 안됐으면 안 되는 거야, 임마. 포기해. 지는 동네 아줌마들하고 놀면서 뭘. 현우 : (기분이 상한다.) ……. 경수 : 나 지난달부터 연주해. 현우 : ? S# 8. 나이트 바 - 밤 조금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재즈바 풍의 술집. 구석 복도에는 술에 취해 부둥켜안고 춤을 추는 아줌마 아저씨 커플도 보인다. 무대 위에서는 경수가 색소폰을 구성지게 불고 있는데, 가만히 들어보면 연희가 흥얼거리던 그 음악. 황당한 표정을 지으면서 무대 옆 테이블에 혼자 앉아있는 현우. 땀에 젖은 경수가 무대에서 내려와 현우 옆에 앉는다. 경수 : 하구 싶지? (현우에게 색소폰을 건네며 무대를 가리키면서.) 해 그럼. 자. 현우 : 그걸 왜 니가 연주해? 경수 : 왜? 서랍 속에 악보 짱박아 두면 뭐해. 내 단골 레파토리야. 현우 : 뭐? 경수 : 너 여기 하루에 얼만 줄 알아? 현우 : (둘러보며.) 천박하게 이런데서…. 경수 : 이 새끼 봐라. 뭐? 천박해? 이 사람들 다 너보다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야. 알아? 너만한 사연쯤은 다 갖고 있어. 너나 잘해. 현우 : ……. (기분이 상한 듯 가방 들고 일어난다.) 경수 : 알았어, 알았어. 내 로얄티 주께. 그럼 됐지? (반짝반짝 금박옷 안쪽에서 돈을 꺼내서.) 형님이 주는 돈이니까 받아라. 용돈 해. 돈도 없잖아 너. 사람이 돈도 있어야지. 현우 : 이게 점점… 애들 등이나 쳐먹는 새끼가…. 경수 : 뭐? 싸늘하게 돌아서 가는 현우. 경수도 기분이 많이 상한 듯 그런 현우를 잡지 않는다. S# 9. 현우 집 - 낮 마루에 TV가 혼자 켜져 있다. 화장실 문이 열려있고, 변기 위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음악잡지를 보고 있는 현우. 그러다 잡지에서 뭔가를 발견 했는지 유심히 보는 듯. 딸깍딸깍,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온다. 엄마다. 피곤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엄마. 뒤에 배낭을 메고 있다. 문을 잽싸게 닫아버리는 현우. 화장실 문 두드리는 소리, 쾅쾅. 현우 : 왜? 엄마 (소리) : 너 또… 엄마가 이런 짓 하지 말랬지? 이럼 어떤 여자가 너 좋다고 하니? 아휴, 이 담배연기 좀 봐. 아니, 왜 똥 누는데 문 열어놓고 테레비를 틀어놓고 눠? 꼭 그래야 똥이 나오니? 엄마의 화난 혼잣말 소리들. 창이란 창은 모조리 다 여는 소리 들리고. 현우, 신경도 안 쓰고 손으로 잡지 한 귀퉁이를 찍 찢어놓는다. S# 10. 현우 집 - 낮 떡을 먹고 있는 현우. 현우 : 웬 떡? 엄마 : 너 떡 좋아하는데, 그동안 못 사다줬네. 맛있니? 현우 : ……. 엄마 : 얘, 현우야. 이것 좀 고쳐봐라. 마루에 놓은 엄마의 낡은 라디오. 엄마가 아무리 켜 보려고 해도 안 된다. 엄마 : 노래도 못 듣고 심심해서 못살겠네. 너 나가면 하루 종일 아무도 없고. (눈치를 보며.) 현우야, 엄마…. 식당일 다시 나오라는데, 나 거기나 나갈까? 현우 : (엄마 얼굴만 쳐다보다가 짜증난다는 듯.) 왜 그래 또. 이제 이사 가면 거기서 여기가 어딘데 거길 다시 다녀. 나 일하잖아. 엄마 : ……. (라디오를 만지작만지작.) 이게 왜 이렇지? 현우 : (떡만 먹으면서.) 이사 가면 주방에 라디오 있던데. 버리구 가 그냥. 엄마 : ……. 현우 : 경수 있잖아…. 술집에서 연주하더라? 엄마 : 결혼하구 피아노학원 한다더니. 현우 : 그 자식 결혼하더니 순 돈독이 올라가지구. 그 새끼 거 원래 안 그랬는데…. 엄마 : 너는 친구한테 그 새끼가 뭐니? 말을 이쁘게 해야지…. 학원은 잘된대? 현우 : 버스도 새걸로 바꿨던데 벌써. 엄마 : …… 근데 연희네 학원은 왜… 문 닫았어? 현우 : (대답 없이 떡만 꾸역꾸역 먹다가.) 걔는 동네 꼬마들 가르쳤던 거고. 얘는 입시 학원이잖아. 엄마 : (라디오를 만지면서.) 너두 그런 데 자리 있나 한번 알아봐달라고 하지. 현우 : 어디? 학원? 엄마 : 아니… 거기…. 현우 : 내가 딴따라야? 엄마 : …… 너 거기 구청 일 대충 대충 하는 거 아니지? 뭐든지 정성으루 해, 정성으루. 현우 : 걱정하지 마. 내가 아줌마들한테 얼마나 인기가 좋은데. (속이 아픈 듯 위를 쓰다듬으며 헛트름을 끄윽끄윽 해댄다.) S# 11. 구청 관악반 - 늦은 오후 구청 건물 계단. 어디선가 관악기 소리들이 들린다. 종이가방을 들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걸어오는 연희. 길을 잘못 들다가 연주 소리를 따라 길을 바꿔 찾는다. 점점 연주 소리가 가까워지고… 모퉁이를 돌면 갑자기 멈추는 소리. 연희 발걸음도 따라 멈추고…. 소리가 사라진 빈 복도. 관악 교습반 앞. 연희가 고개를 내밀면 현우가 아줌마들을 상대로 수업 중이다. 경청중인 아줌마들. 현우 : 생각해 보세요. 음악을 못 듣고 살면 이 세상이 얼마나 심심할까. 하다못해 라디오 하나가 망가져도 심심하시죠? 하는데… 아줌마가 누구 왔다는 듯 현우를 쳐다보면, 연희의 화장기 없는 맑은 얼굴. S# 12. 거리 - 오후 (비) 부슬비가 내리는 거리. 연희가 현우를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오는 소리가 들리면 뒤를 돌아보고, 돌아보고 다시 걷고… 현우가 온다. 다가가 우산을 씌워 주는 연희. 현우 슬며시 피한다. 또 씌워주는 연희. 현우 가만있다. 연희 : …. 현우 : … 경수한테 들었니? 연희 : … 응. 어디 좀 들어가자. 나 추워. 현우 : 여기 갈 데 없어. 그냥 말해. 연희 : 오빠 왜 이런 거 해? 돈 받고 학원강사 같은 거 안하잖아. 현우 : 잠깐 하는 거야. 연희 : (미소.) 선생님 어울린다, 오빠. 현우 : (쪽팔린 듯.) 왜 왔어? 연희 : 왜, 겁나? … 또 같이 살자 그럴까봐? 현우 : ……. 연희 : 연습은 많이 했어? 좀 있으면 오디션 있잖아. 현우 : 그거 알려주러 왔어? 연희는 현우의 짜증 섞인 반응에 익숙한 표정이다. 연희 : 이거. 현우 : 그게 뭐야? 연희 : … 영양제. 현우 : 영양제? 연희 : 엄마 가져다 드려. 현우 : 우리 엄만 멀쩡하니까, 니네 엄마나 가져다 드려. 괜한 신경 쓰지 말구. 연희 : 할머니들 다 아퍼. 이왕 가져왔는데 그냥 가져가라. 좀. 현우 : … 너 왜 이래? 속상한 현우는 그냥 돌아서 가 버린다. S# 13. 도로 - 흐린 오후 라디오. DJ의 소개와 함께 흐르기 시작하는 댄스뮤직. 한두 번 정도 주파수를 바꿔보지만 댄스뮤직과 트로트가 걸린다. 라디오를 꺼버리는 현우. 부드럽게 작동하지 않고 한번씩 엇박자를 타는 와이퍼. 신호등에 정차한 현우의 낡은 차.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꺼져버린다. 현우 : …… ? 차 밖으로 나와 불 꺼진 헤드라이트를 보는 현우. 속상한 듯 차를 한대 걷어차면 헤드라이트 하나가 다시 희미하게 들어온다. 뒤에서 빵빵빵… 현우 : 에이 저 씨발…. 빵빵거리는 차에다가 신경질을 팍 내는 현우. S# 14. 현우 집 - 밤 비 그친 동네 풍경. 마루에 걸터앉아 마당으로 난 창을 열어놓고 담배를 피우는 현우. 안쪽에서는 엄마가 사진첩을 꺼내놓고 정리를 하고 있다. 엄마는 맘에 드는 사진을 빼서 포켓용 사진첩에 옮기면서 중간 중간 사진을 들고 쳐다보기도 하고… 아버지 사진, 현우 학교 다닐 때 친구들과 트럼펫 들고 찍은 사진들. 현우 : 내일 사람들이 와서 다 싸준다는데, 뭘 그렇게 싸고 또 싸고 그래? 엄마 : 그게 어디… 내가 한 것만 하니. 니 방 가서 피워. 온 집안에 냄새 배게 그걸 왜 여기서 피우고 있어. 마당에 나가서 피우든지. 너 좋아 피우는 걸 왜 남한테 피해를 줘? 현우 : 이사 갈 건데 뭐 어때? 엄마 : 모기장은 왜 열어 놨어…. 엄마, 일어나서 현우를 밀치고 창문을 닫는다. 귀찮아 죽으려고 하는 현우. 현우 : (다시 창문을 열며.) 아~ 비 왔는데 무슨 모기. 지금 때가 어느 땐데 모기가 있어? 엄마 : 어머 얘가… 이게 이게 언제 철들어. 모기가 왜 없어, 있지! 요즘은 겨울에도 모기 있는 거 몰라? 그리구 너 모기가 비 그친 거 모를 것 같애? 왜… 엄마 말이 짜증나? 얹혀살지 말고 나가, 그러니까. 현우 : 내가 못 나갈 거 같애? 엄마 : 그래 제발 좀 나가라… 제발. 난 너 없으면 더 좋아. 확 일어나서 현관으로 가는 현우. 엄마 : (피식 웃으면서.) 나가는 거니? 현우 : 그래, 나간다. S# 15. 현우 동네 - 밤~새벽~아침 집안 구석구석, 낡았지만 정이 가는 풍경들. 빗물이 아직 떨어지고 있는 낡은 처마 밑에서 비를 피해 있는 주인모를 고양이. 대문을 열고 나와 집을 쳐다보는 현우. 천천히 걸으며 동네를 둘러본다. 노란 가로등이 묻어 있는 비 웅덩이들. 색색깔 우산을 쓰고 그 웅덩이에서 물장난을 치는 아이들을 엄마들이 나와 데리고 들어가고. 아직 불이 켜진 가게. 그 앞에 맥주 한잔 하는 동네 아저씨들. 아이들도, 행인들도 집으로 돌아가고, 가게에 파라솔을 들여가는 아저씨. 가게 불도 꺼진다. 밤이 가고 아침이 오는 풍경들. 쓰레기차… 두부장사… 이제는 추워지기 시작한 날씨. 손을 불며 학교에 가는 아이들. 문을 열고 바쁘게 뛰어가는 옆집 아저씨. 그대로 천천히 멀어지는 풍경들. 익숙한 풍경들도, 가게도, 현우네 집도, 점점 멀어진다. 그 위로 “연희두 아니? 우리 이사 가는 거?” “…… 엄만 이사 가니까 좋아?” “그럼 좋지…. 어디, 엄마두 아파트 한번 살아보자.” 이삿짐 차를 호송하는 현우의 낡은 차가 동네를 벗어난다. 운전하는 현우. 현우 : ……. 창 밖으로 지나가는 동네 풍경을 보고 앉은 엄마. 말처럼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는 얼굴. S# 16. 현우네 새 집 - 저녁 아직 정리 안 된 집. 어수선하다. 자장면 시켜 먹은 그릇들이 현관에 쌓여 있고, 풀다 만 박스들이 여기 저기 놓여있다. TV 앞에 앉아 드라마를 보고 있는 현우와 짐 정리하느라 바쁜 엄마. 현우 : 여긴 테레비 잘 나온다, 엄마…. 아파트가 좋긴 좋네. “현우야… 이것 좀 들어줄래?.” 현우 : 뭐? 엄마 : 아냐… 내가 할게. 현우 : (뺀질뺀질한 얼굴을 하고선.) 엄마 그거 오늘 하루에 안돼… 두구두구 해야지. 내 껀 그냥 둬… 내가 할게. 엄마 : 니가 그러구 있으면 두구두구 해두 안되지…. ‘사랑의 슬픔’ 할 때 안됐니? 그거 하면 말해. 그거 보구 정리 해야지. 현우 : 그건 월화 드라마라니까. (일어나 앉으며.) 봐 엄마. 저건 일일 드라마. 매일 밤 8시 30분. ‘사랑의 슬픔’은 월요일 화요일 밤 10시. ‘안녕하세요 또 만났군요’는 수목드라마. 또…. 현우가 주절주절 드라마 시간대를 꿰고 있는데, 엄마가 뭔가를 들고서 다가온다. 발 밖에 안 보이는 엄마. 게으름을 피우는 현우의 코앞에다가 쑥 들이밀며, “이거나 챙기시죠, 도련님.” 엄마가 내미는 물건을 보더니 현우 : (짜증을 팍 내며.) 내 껀 그냥 두라니까…. 트럼펫을 받아서 뒤에 기대앉은 소파에 휙 던져버리는 현우. 소파 위에 뚝 떨어져 나동그라진 반짝이는 은빛 트럼펫. S# 17. 현우네 새 집 - 아침 적당히 정리가 된 현우 집. 밥을 먹고 있는 현우. 미역국 외 몇 개의 반찬이 놓인 식탁. 현우 : 누구 생일이야? (미역국 그릇에 아주 얼굴을 들이밀고 꿀꺽 꿀꺽 마셔대는 현우.) 엄마 : 왜? 미역국 싫으면 딴 거 끓여줄게. 현우 : (밥 먹다가 뭔가 생각난 듯.) 아… 씨…. (짜증 섞인 표정.) 오늘 며칠이야? 엄마 : 맛없니? 현우 : …… 좀 짜네. 엄마 : 그치 좀 짜지…? 며느리래두 있으면 더 늦기 전에 내가 음식도 가르쳐 주고 할 텐데. 늙으니까 입맛이 자꾸 짜지네……. 현우 : ……. 엄마 : (식탁에 놓여있는 소화제를 건네며.) 밥을 이렇게 제시간에 먹어야 탈이 안 나지. 근데 니가 웬일이니? 이렇게 일찍 일어나구? S# 18. 국립극장 오디션장 - 낮 시향의 신입단원 모집 오디션. 오디션장 밖 복도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는 현우. 다소 긴장한 모습이다. 머리도 단정하게 빗고 면도도 하고, 깔끔하게 단장한 현우. 트럼펫을 들고 있다. 방안에서 관계자가 나와 현우의 이름을 부른다. “이현우씨!” 심사위원들이 피곤한 얼굴로 쭉 앉아 있고, 그 앞에 트럼펫을 들고 앉아 연주를 하는 현우. ‘삑-’ 긴장한 탓인지 연주 중간에 실수를 한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당혹감에 얼굴이 다 벌겋다. 심사위원1 : 수고했어요. S# 19. 국립극장 대무대 - 낮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시향 단원들이 공연 리허설을 하고 있다. 편한 캐주얼 차림으로 즐겁게 연습을 하는 단원들. 간혹 웃음소리도 들려온다. 공연장 입구에 서서 그들의 여유로운 연습 장면을 보는 현우. 현우 : (혼잣말로.) 니미…. ‘누구세요?’ 뒤에서 누군가 부른다. 돌아보면 수위아저씨다. 수위아저씨 : 무슨 일이세요? 현우 : 아뇨. 그냥 구경 좀 하느라구요. 수위아저씨 : 여기 아무나 들어오시는 데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현우 : 아… 네. (억지로 웃어 보이는 현우.) 연습하던 시향 단원들이 우르르 몰려나온다. 쉬는 시간인가 보다. 당당하고 자신에 차 보이는 그들의 모습. 수위아저씨를 따라 나가고 있는 현우의 뒷모습. 왠지 초라해 보인다. S# 20. 현우네 새 동네 - 밤 가게 앞을 지나는 현우의 전화벨이 울린다. 발신자를 확인하고 망설이다가 결국 받는 현우. 연희 : (착 가라앉은 목소리.) …… 뭐해? 현우 : … 그냥 있어. 연희 : 집이야? 현우 : … 어. 연희 : 나… 지금 앞에 와 있는데… 잠깐 나올래? 집 앞이라는 말에 사방을 둘러보며 눈치를 보더니, 길 가 가로수 뒤로 숨는 현우. 현우 : 어… 지금은 좀 그런데…. 잠시 동안 서로 말이 없는 두 사람. 현우는 가로수 옆 광고지 진열대에 기대어 쭈그려 앉은 채다. 연희 : 오빠…. 현우 : 어… 말해. 연희 : (뜸을 들이다가.) 오디션 잘 봤어? 현우 : 어… 그거… 연기됐어. 오디션. 연희 : ……. 현우 : ……. 연희 : 나 결혼할 것 같애…. 현우 : ……. 연희 : ……. 현우 : … 언제? 연희 : … 봄에. 현우 : …… 잘됐다. 연희 : 나 미안해 해야 돼? 현우 : 아니. 니가 뭐가 미안해… 야~ 너는 왜 하필 황사가 몰려오는 그런 때 결혼을 하구 그래… 그 얘기 할려구 그렇게 전화하구, 찾아오구, 그런 거구나? 말을 하지 바보야. 연희 : … 좋아? 현우 : 그럼 좋지… 행복해라. 제발… 부탁이다. 연희 : 진심이야? 현우 : …… 응. 연희 : ……. 현우 : ……. 연희 : ……그럼 끊을게. 안녕. 현우 : ……. S# 21. 현우네 옛집 앞 - 밤 전화를 끊고 연희가 서 있는 모습. 예전 현우의 집이 보이는 가게 앞.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리는 연희의 쓸쓸한 모습. S# 22. 현우네 새 동네 - 밤 전화를 끊고 일어나 사방을 둘러보다가 새 동네로 이사 온 걸 그제서야 깨닫는 현우. 자신을 숨겨주었던 나무를 올려다본다. 다 죽어가는 건지 바짝 말라 나뭇잎이 하나도 없는 나무가 앙상한 모습을 드러낸다. 현우 : ……. 나무를 바라보며 잠깐을 그렇게 서 있다가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지갑을 꺼내 작은 종이쪽지를 찾아내 펴보면, 손으로 대충 찢어놓았던 잡지. “관악지도 선생님을 구합니다” “해당 전공자 우대” “도계중학교” 짧은 망설임. 전화를 꺼내면서 구멍가게로 들어가며, 현우 : (전화를 거는.) 예… 모집광고 보구 전화 드렸는데요. 예…. (전화기를 가리고, 가게 주인에게 아주 작게.) 디스 플러스 하나주세요. 강원도 어디쯤이죠? 가게 주인 옆에 김이 뿜어져 나오는 가습기. 현우는 가습기 하얀 수증기에 얼굴을 가져 가 대보는데, 얼굴에 부서지는 수증기가 간지러운지 기분 좋은 표정이다. 연희가 중얼거리던 그 선율이 머릿속에 천천히 떠오르더니 점점 또렷해진다. 연희의 허밍처럼 들리다가 차츰 트럼펫 선율로 분명해 지는 선율. S# 23. 구청 관악반 - 낮 강의가 막 끝난 시간. 밝지 않은 표정으로 관악부 연습실을 기웃거리는 연희. 구청직원이 지나가다가, 구청직원 : 누구, 찾으세요? 연희 : 관악부 지도 강사님 있죠…. 이현우씨. 구청직원 : 아~ 현우씨. 그만 뒀는데요? 연희 : (실망한 듯.) 왜요? 구청직원 : 임시직이었는데, 원래 선생님이 돌아오셔서요. 연희 : 언제요? 구청직원 : 지난주에요. 아줌마들이 강의실을 나오는데 연희가 힐끗 안을 보면, 배 나오고 머리 벗겨진 강사가 수업을 마치고 교단을 정리하고 있다. 난감한 표정의 연희. S# 24. 강원도로 가는 길 - 낮 검은 개천이 흐르는 길을 따라 달리기도 하고, 석탄을 가득 실은 기차와 나란히 달리는 현우의 차. 휴게소의 화장실에서 나오는 현우, 휴게소 광장에 차도 사람도 한명 없는데 묻지 마 관광버스 한대가 들어와 멈춘다. 아저씨 아줌마들이 우르르 내리는데 들려오는 음악. “헬로와 헬로와 봄날은 헬로와 헬로와 우리들에게 흠마 흠마 흠마 흠마 예 그 추웠던 겨울은 지나고 따뜻한 봄이 오면 내님도 나를 찾겠지” 커피 한잔을 빼들고 오다가, 아직도 흥에 겨워 춤추는 몸짓을 하며 화장실로 걸어가는 아저씨와 마주치는 현우. 한심스럽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현우, 차에 올라 겔겔겔 시동을 걸고. 검은 연기를 뿜어대며 멀어지는 현우의 낡은 차.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는 따뜻한 봄이 오면 그 님도 나를 찾겠지” S# 25. 언덕 - 낮 언덕길을 넘자 해질녘 읍내 풍경이 시야에 들어온다. 차를 잠깐 세우고 밖으로 나오는 현우. 언덕에서 바라보면, 성당 너머로 펼쳐진 평범한 시골 읍내의 풍경. 가로등 옆 쓸쓸해 보이는 커피 자판기. 커피를 뽑아 한 모금 먹다가 얼굴을 찡그리며 컵에 도로 뱉는 현우. S# 26. 도계 읍내 가게 - 낮 음료수 박스들을 이리저리 살피는 현우. 마음에 드는지 두 개를 집어들고 계산대로 간다. 현우 : 저… 도계중이 어느쪽이죠? 가게주인 : 이쪽으로 쭉 가시면 삼거리가 나오거든요, 거기서 오른쪽으로 꺾어지면 바로 보일 거예요. 현우 : 네… 이때 가게로 들어오는 수연. 현우는 음료수 박스를 들고 나와 차를 타려다, 수연이 나오자 길을 다시 한번 묻는다. 현우 : 저 도계중학교가 어딥니까? 수연 : 저기 삼거리 보이시죠? 거기서 우회전… 그럼 돼요. 차에 시동을 거는 현우. 부르르 끼릭끼릭 한참을 요동 친 후에 검은 연기를 뿜어내며 시동이 걸린다. 수연은 조금 찡그리는 것도 같고, 창피해서 백미러로 힐끗 힐끗 쳐다보는 현우. 현우 : (운전을 하면서도 힐끗힐끗 쳐다본다.) … 차를 몰고 가며 주변을 둘러보다 다시 전방을 쳐다보는데, 차 바로 앞에서 막 무단횡단을 하려는 할머니. ‘끼익-!’ 급정거한 후 짜증스럽게 경적을 울리는 현우. 미안하다는 듯 서둘러 길을 건너오는,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있는 할머니. 차 안의 현우에게 미안하다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계속 하신다. 현우 : 에이…씨. S# 27. 학교 - 낮 드르륵 문이 열리면, 썰렁한 교무실. 졸고 있는 당직. 음료수 박스를 든 현우가 들어서자 천천히 일어난다. 당직 : 뭐예요? 배달? 현우 : 아니 그게 아니라요, 저… 서울에서 왔거든요. 당직 : (안경 찾아 쓰며.) 네? 현우 : 예… 저 관악부 때문에. 당직 : 예? 현우 : 관악부요. 당직 : 아~ 뺀드부? (기지개라도 켜고 일어서며.) 허, 진짜 오셨네? 현우 : 네? 당직 : 아, 아니… 이쪽으로 오세요. 추리닝 차림으로 슬리퍼를 끌고 휘적휘적 앞서서 가는 당직 선생. 별관으로 들어서는 두 사람. 조용하다. 당직 : 조용한 걸 보니 애들이 다 갔나보네. 전에 있던 선생이 술 쳐먹고 사고 친 담에 쫓겨 갔는데, 덕분에 요즘은 좀 살 것 같더니… 현우 : (박스를 들고 뒤를 따라가며.) 네… S# 28. 관악실 - 낮 비어있는 관악실. 아이들 주려고 사온 음료수를 들고 관악실을 둘러보는 현우. 벽에 걸린 단체사진들. 제일 마지막에 걸린 사진에 눈이 가는 현우. 사람 좋게 보이는 전임교사를 중심으로 도열해 있는 관악부의 모습이 보인다. 사방에 갈색 커튼이 길게 드리워져 있는 관악부 연습실. 색이 바랜 각종 대회의 트로피들이 벽장을 하나 가득 메우고 있다. 악기와 장비들을 둘러보는 현우. 망가진 악기들이 눈에 띈다. 낡고, 좁고, 후지고…. 매캐한 먼지. 벽에는 낙서까지…. 벽을 주의 깊게 만져 보고, 바닥을 굴러도 보고, 군데군데 침이 그득 고인 종이컵들도 놓여있다. 구석에 놓인, 먼지 쌓인 오래전 전국대회 우승기를 보며 신기해하는 현우. 한숨을 쉬며 주변을 둘러본다. 당직 (소리) : 맘에 드세요? S# 29. 자취방 - 밤 아무 가재도구도 가구도 없는 그냥 텅 빈 방. TV 한 대가 바닥에 달랑 놓여 있다. 좀 한심한 기분이 드는 현우. 바닥을 만져보면 아직 냉기가 남아 있다. 이불 아래로 손을 넣어보면 엄지 손가락만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이불속에서 나와 잽싸게 도망간다.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는 현우. --- S# 30. 관악실 - 낮 하얗게 칠해진 별관 건물의 현관에 들어서자 시끄럽게 들려오는 연주음들. 두두두두 경쾌한 드럼소리, 멋을 한껏 부린 색소폰 소리, 장난처럼 빽빽거리는 트럼펫소리. 계단을 지나 관악실 앞 복도에 다다른 현우. 가까워질수록 관악기 음들이 점점 커진다. 현우가 문을 살짝 열어보면, 학생 두 명(용석이와 심벌즈)이 소리까지 질러대면서 팀파니 채와 심벌즈를 칼과 방패삼아 전투중이다. 현우가 들어서자 두 학생, 깜짝 놀라 전투를 멈춘다. ‘그대로 멈춰라’ 상태의 아이들. 호기심 어린 눈길로 현우를 바라본다. 책상 위에 앉은 놈도 있고, 말뚝 박기 하던 놈들도 있고. 몇몇 아이들은 안대를 하고 있다. 심벌즈 : 누구세요? 저… (조금 힘을 실어서.) 여기 아무나 들어오면 안 되는데요. 현우 : (말없이 지휘대 쪽으로 가는.) ……. 심벌즈 : (단호하게.)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요. 현우 : (기분 나쁘지만 참고.) 어… 여기가 뺀드부 맞지. 심벌즈 : 뺀드부가 아니라 관악분데요. 현우 : 어 그래… 관악부. 문이 열리며 당직이 따라 들어온다. 당직을 보는 아이들의 재수 없다는 표정을 금방 읽어내는 현우. 악장이 일어나 “차렷, 경례”를 시킨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자세를 잡고 거만하게 인사를 받는 당직. 당직 : 어 그래, 이 선생님은 여러분을 앞으로 지도해 주실 이현우 선생님이야. 선생님 말씀 잘 듣도록. 알았지? 말썽 피우지 말고. 아이들 : (웅성웅성웅성.) 당직이 나가고 아이들과 현우만 남았다. 약간의 긴장감. 악장 : 선생님 서울에서 오셨어요. 현우 : 응. 아이들 : ……. 용석 : 서울대학교 나오셨어요. 현우 : 응?… 응…. ………. 근데 인원이 이거밖에 안 돼. 대답이 없는 아이들. 현우 : (안대를 한 아이들을 보며.) 너희들은 다 눈병 걸린 거야. 심벌즈 : 예. 안대를 하지 않은 심벌즈, 당당하게 대신 대답한다. 재미있어 하는 현우. 현우 : (우승기를 턱으로 가리키며.) 저거 너희가 가져온 거니. 아이들 : … 네. 현우 : 작년 게 아니던데. 너희가 가져온 거 아니지. 악장 : …… 저희 선배들이 가져온 거예요. 몇 년 전에. 심벌즈 : 올해는 우리도 우승할 건데요. 현우 : (기가 막히다.) ……. 아이들을 살펴보는 현우. 20여 명 조금 넘는 규모. 작고 가난해 보이는 아이들. 군데군데 때운 자국이 있는 낡은 악기들. --- S# 31. 관악실 - 낮 현우와 마주보고 앉아있는 악장. 현우 : 넌, 음악 왜 하니. 악장 : 네. 현우 : 음악, 왜 하냐고. 악장 : …… 저기… 그게 저…. ---경과--- 안대를 한 재일이와 현우. 재일이의 작은 손에 들려있는 트럼펫에는 구멍도 나 있다. 현우 : 트럼펫이야. 재일 : 네…. 근데 저… 주무실 데는 있으세요. 현우 : 어..? 어…. 근데 그거 소리 나는 거니. 줘 봐. 재일 : (겸연쩍게 웃으면서.) 잘 안 나요. 현우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재일. 현우 : 야, 좀… 떨어져. ---경과--- 색소폰을 들고 선 용석. 바지를 바싹 줄여 입은 데다, 염색이라도 했는지 머리카락엔 갈색 빛이 돈다. 용석 : ……. 현우 : 한번 불어봐. 뭐 잘하나 보자. 용석 : (머뭇머뭇.) ……. 현우 : 그냥 아무거나 해 봐. 연주하는 용석. 나름대로 제 소리를 찾아가는 용석의 연주. 약간의 기교도 부릴 줄 안다. 현우 : 됐어. 그만. 용석 : (색소폰을 내려놓는다.) ……. 현우 : 곧잘 하네. 용석 : (불만 가득한 표정.) ……. 현우 : 넌 왜 음악하니. 이거, 관악부 왜 해. 용석 : ……. 현우 : 말해 봐. 용석 : 유명해질 거예요. 현우 : 유명한 사람… 아는 사람 있어. 용석 : (자랑스럽게.) 케니 지요. 현우 : (고개를 끄덕이며 놀리듯.) 오, 케니 지. 엉거주춤 일어나 나가려는 용석에게 현우. 현우 : 폼 잡지 마. 알았어. 음악은 폼으로 하는 게 아니야. 용석 : ……. 복도에는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무료한 아이들. 밖을 보며 창가에 기대어 있다. 잠시 후 기분 나쁜 표정의 용석이 나온다. 아이들이 하나하나 지나갈 때마다 묘하게 엇박자로 붙는 음악들. 안 어울릴 것 같은 곡조들이 조금씩 어우러진다. 각기 다른 아이들이 하나씩 하나씩 차례로 하나의 곡처럼 이어 연주하는 모양새. 심벌즈는 엉뚱한 박자에 쳐 버리고. 팀파니, 플룻, 트럼본… 짧게 짧게 제 역할을 하고 빠지는 그림들. 경쾌하지만 조금 슬픈 나팔소리가 낮게 깔리는 하얗게 빈 운동장. --- S# 32. 약국 - 낮 안쪽에 방이 하나 있을 만한 아담한 시골 읍내 약국. 약국 오디오에서 귀에 익숙한 음악이 흘러나온다. 추리닝 차림으로 약국 안으로 들어서는 현우. 사람을 찾는데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길 건너 할머니들 좌판대 앞에 쪼그려 앉아있던 수연이 약국 안으로 들어온다. 손에 들린 떡 봉지. 현우 : (안쪽을 기웃거리다 수연을 보며.) 사람이 없나 본데요. 수연 : 그래요. 장사 안 하나. 현우, 시끄러운지 진열대 너머의 오디오를 눌러 끄더니 방문 앞에 서서 사람을 부르다가 그 안을 들여다본다. 현우의 그런 모습을 지켜만 보던 수연. 수연 : 뭐하세요, 지금. 현우 : 예. 주인 찾는데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운을 입는 수연. 현우 : (미안하다.) ……. 수연 : ……. 현우 :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러는데, 소화제 좀 주세요. 수연 : (뾰루퉁.) 참 나…. 속이 어떻게 안 좋으신데요. 현우 : 그냥 더부룩하고, 자꾸 헛트름 나고, 좀 아파요. 가끔 가다가…. 수연 : ……. 잘 때도 아프세요. 현우 : 네. 자다가도 아파서 깨요. 수연 : 변비도 심하구요. 현우 : ……… 있어요. 수연 : 속이 많이 상하신 것 같거든요. 병원에 먼저 가보세요. 현우 : 아녜요… 저는 그냥 소화제 먹으면 낫더라고요. 수연 : ……. 현우 : 그냥 소화제나 좋은 거 하나 주세요. 더 이상 관심 없다는 듯 서랍에서 약을 꺼내는 수연. 몸을 굽히면 가운 속으로 하얀 속살이 조금 내보인다. 슬쩍 들여다보는 현우. 수연 : (약을 내밀며.) 식사하시고 30분 있다 드세요. 현우 : 예. 수연 : 2500원입니다. 현우 : 참, 혹시 눈병 예방약 같은 거 있어요. 수연 : 그런 건 없어요…. (다시 오디오를 켜면 돌아가기 시작하는 CD.) 소화제 드시면 눈병 안 걸려요. 약국 진열대 위에 놓인 색색깔의 떡이 눈에 들어오는 현우. --- S# 33. 기찻길 옆 - 낮 약국을 나온 현우, 좌판들이 있는 길 건너편으로 다가온다. 떡 파는 할머니 앞, 색색깔의 예쁜 떡들에 눈길을 주는 현우. 할머니 : 떡 들여가요. 현우가 쭈그리고 앉자, 할머니가 인절미를 하나 집어 입에 넣어준다. 할머니 : 맛있지. 우물우물 먹다가 그제서야 할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보면 며칠 전 차로 칠 뻔했던 할머니. 당황스럽다. 서둘러 자리를 뜨려는 듯. 현우 : (인절미를 가리키며.) 이거 한 봉지 주세요. 얼마예요. 할머니 : 이천원. 현우, 주머니를 뒤져보는데, 동전 몇 개뿐이다. 할머니 : (현우를 바라보다가.) 없으면 그냥 다음에 줘도 돼. 현우 : 아… 아니에요…. 할머니 : (떡봉지를 떠넘기며.) 가져가서 맛있게 먹어요. 미안하면서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떡봉지를 받아드는 현우. ‘땡-땡-땡-땡-’ 기차가 오는 소리 들리고. 건널목의 차단기가 내려오고, 차들도 멈추어 선다. 떡봉지를 하나 들고 건널목에 서 있는 현우. 연희가 흥얼거리던 곡을 흥얼거리고 있다. 바람을 일으키며 현우 앞을 쏜살같이 지나치는 화물열차. 현우의 흥얼거림이 열차소리에 묻힌다. --- S# 34. 관악실 - 낮 빈 복도. 아이들의 불협화음 연주 소리가 들려오다가 갑자기 뚝 그치면, 두루마리 휴지를 든 심벌즈가 튀어나온다. 화장실로 뛰어가는 심벌즈. 현우 : 화장실 갈 사람들 갔다 와. 아이들 일어나서 나간다. 현우의 전화가 울린다. 확인하고 받지 않는 현우. 전화 계속 울린다. 전화를 받지 않는 현우를 아이들이 이상하게 쳐다본다. 용석 : 전화 왔는데요. 현우 : ……. 현우 : (복도 창가로 가면서.) 여보세요. 남자 : 예… 안녕하세요. 이현우 고객님이시죠. 현우 : 그런데요. 남자 : 예, 여기 “쓰자 카드”인데요. 고객님 카드 값이 석 달째 연체되고 있어서 전화 드렸습니다. 현우 : 나, 돈 쓴 거 없는데…. 남자 : “티파니 3종세트”라고 되어있는데요. 2001년 연말에 구입하셨네요. 현우 : 티파니요. 남자 : 귀금속류 취급하는 곳 아닌가요. 현우 : ……. 남자 : 다음 주까지 되시겠습니까. 현우 : 예…. 아니, 월말까지 넣을게요. --- S# 35. 도계 거리 - 밤 길가를 둘러보며 걷고 있던 현우.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건다. 현우 : 안녕하세요. 경수 : 왜 전화했냐, 너. 현우 : 새끼 삐지긴. 경수 : 너 강원도 가서 선생님 한다며. 좋냐. 현우 : 좋지. 애들 착하지, 공기 좋지, 여기 또 예쁜 약사 누나도 있어요…. 경수 : 애들은 잘해. 현우 : 어, 다 너만큼은 하던데. 경수 : (한번 웃고 만다.) 아니다 싶으면 때려치든가…. 현우 : 봄에 애들 무슨 대회가 있댄다. 그때까진 있어야 돼. 서울 가면 또 내가 뭐하냐. 누가 날 반겨준다고…. 경수 : 나 있잖아, 나. 현우가 지나던 건물 담벼락에 붙어있는 조그만 구인광고. <파라다이스 캬바레 밴드 연주자 모집. 숙식 제공.> 현우 : (흥미롭게 한번 보더니.) 너 밤무대는 계속 다니냐. 경수 : 밤무대가 뭐냐 밤무대가…. 다니지 그럼. 그게 돈이 얼만데. 현우 : 어이구 좋겠다. 경수 : 너… 연희 결혼한다는 얘기 들었어. 현우 : …… 아니. 경수 : 몰랐어. 현우 : 응…. 잘됐네. 경수 : …… 괜찮아. 현우 : 그럼 괜찮지. --- S# 36. 학교 옆 도로 - 낮 수정이가 앞서가고 용석이가 뒤를 따른다. 수정이는 자꾸 돌아서 뭐라고 하는데, 약간 주눅이 든 듯 뒤를 계속 따라가는 용석. 둘이서 티격태격 하더니 도서관 쪽으로 수정이가 가 버린다. 터벅터벅 걸어오는 용석이가 고개를 들면, 차를 세우고 보고 있는 현우. 용석이 도망가려는데…. 현우 : 그래 가지고 여자 꼬시겠어. 용석 : (도망도 못 가고 뻘줌하게 인사를 한다.) ……. 현우 : 좋아해. 용석 : ……. 현우 : 왜 대답이 없어. 용석 : 절 별로 안 좋아해요. 현우 : 내가 볼 땐 너 많이 좋아하는 거 같은데. 용석 : … 아니에요. 현우 : 너 나팔 잘 불잖아. 나팔도 불어주고 그래야지. 그래야 좋아하지. 따라만 다닌다고 되니. 폼 잘 잡고 불어야 된다. 알았지. 용석 : ……. 현우 : 잘해봐. 용석 : ……. 현우 : 야. 너 이름 뭐지. 용석 : (기분 나쁜.) 강용석인데요. 현우 : 어 그래. 용석아, 너 밥 먹었어. 용석 : 먹었는데요…. 왜요. 현우 : 아냐…. --- S# 37. 카센터 - 밤 재일이 아르바이트 하고 있는 동네 어귀의 주유소. “이 차에는 아가씨가 타고 있습니다” 라고 쓰인 티코가 서 있다. 트럭에 주유를 끝내고 사무실로 들어오는 재일. 사무실 안에는 사장이 커피를 시켜놓고 레지와 히히덕거리고 있다. 재일 : 저 갈게요. 사장 : (재일은 보지도 않고.) 내일은 늦지 마라. 재일이 사무실 문을 막 나서는데 주유소 옆에 딸린 카센터로 현우의 차가 달달달 들어온다. 빵빵- 경적을 울리자 안쪽에서 밥 먹다 말고 나오는 남자. 인상은 조금 걸걸한데, 눈은 선하게 생겼다. 주호다. 현우 : (차에서 내리다 재일을 보고.) 어, 너 여기서 아르바이트 하는구나. 재일 : (꾸벅.) 안녕하세요. 현우 : (주호에게.) 이게 시동이 잘 안 걸리네요. 주호 : 네… 본넷 좀 열어 주세요. (재일이를 보며 누구냐는 눈짓.) 재일 : 새로 오신 관악부 선생님이에요. 주호 : 우리 재일이 좀 잘 봐주세요. 현우 : 네…. 식사 중이신데 괜히…. 주호 : 다 먹었어요. --- S# 38. 파출소 앞 - 밤 낡은 현우 차에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오디오를 보고는 궁금해 하는 재일이. 오디오에 반쯤 나와 있는 테이프를 밀어 넣는다. 흘러나오는 것은 연희의 음악이다. 연희가 흥얼거리고, 경수가 술집에서 연주하던 그 음악. 제지하려다 그냥 넘어가는 현우. 재일 : 이거 제목이 뭐예요. 현우 : 제목. 제목 없는데…. 재일 : 왜요. 선생님이 만드신 거예요. 현우 : 어… 옛날에 뭐… 재미로 만든 거야 대충…. 재일 : 되게 좋다. 현우 : 좋긴 뭐가 좋아. 우울하기만 하지. 재일 : 좋은데…. 파출소 앞을 지나는데 안에서 할머니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재일 : 어! 잠깐만요. 차를 세우는 현우. 순경이 나와서 배웅을 하고, 연신 “죄송합니다” 하며 머리를 조아리는 할머니. 현우 : (할머니를 알아보고.) 어? 왜, 아는 할머니야. 재일 : 네…. 그냥 가세요. (고개를 숙인다.) 현우 : 왜. 태워드리지…. 재일 : 아니요, 그냥 가세요. 이상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출발하려는데 할머니는 신호등을 무시하고 그냥 길을 건너간다. 위태로워 보이는 할머니. 재일이는 할머니가 볼까 고개를 수그리고 있고, 현우는 할머니가 길을 건너는 동안 기다린다. 뒤에선 택시가 빵빵-. 현우 : 좀 기다려라 임마. 재일 : 예. 현우 : 어, 아냐, 너 말고…. 근데, 할머니가 왜 파출소에서 나오시니. 재일이 : ……. 현우 : …… 밥 먹었어. 재일 : 아뇨. 현우 : 잘됐다… 나 밥 혼자 먹기 싫은데, 선생님이랑 같이 먹을래. --- S# 39. 자취방 - 밤 현우 자취방. 물을 끓이면서 라면을 꺼내는 현우. 재일 : (라면을 보더니.) 밥은 없어요. 현우 : 맨날 먹는 밥 또 먹어. 라면 맛있잖아. 가끔 라면도 먹어줘야지. 재일이 더 이상 말이 없고 현우의 방안에 관심을 갖는다. 작은 앉은뱅이 책상도 있고. 박스에 차곡차곡 개어져 있는 옷들. 무엇보다 눈에 띄는 많은 음반들. 바닥에 널부러져 있는 악보. 이것저것 보더니. 재일 : 저… 아까 그 곡은 악보 없어요. 현우 : (힐끗 보고는.) 지금은 없는데… 왜. 재일 : 연습해서요, 우리 할머니 좀 불어드리게요. 현우 : (허락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래 그럼…. 내가 나중에 그려줄게. 재일 : (신이 나서.) 네. 김치도 없이 라면을 먹고 있는 두 사람. 재일 : 김치는 없어요. 현우 : 그냥 먹자. 라면은 김치 없이 먹는 게 더 맛있는 거야 원래. 재일 : 그래도…. 현우 : 너 아직 배가 덜 고프구나. 재일 : …… 선생님. 근데 우리 정말 우승할 수 있을까요. 현우 : 내가 너희한테 우승할 수 있다고 하면 그건 사기치는 거야. 그럴 순 없잖아. 재일 : … 근데 이번에 상 못 타면 관악부 없어질지도 모른대요. 현우 : 그래. 학교가 뭐 그래. 재일 : 애들이 선생님 서울에서 왔다고 굉장히 좋아하는데. 현우 : 서울서 온 선생님은 뭐 다르니. 재일 : 그래도 선생님은 서울대학교 나오셨잖아요. 움찔하고는 라면만 먹는 현우. 김치를 집으려 손이 가는데 김치가 없다. 젓가락을 놓더니. 현우 : … 이거 김치 없으니까 정말 못 먹겠다. 재일 : 선생님 악기는 어디 있어요. 좀 보여주세요. 현우 : 응. 주위를 둘러봐도 현우의 은색 트럼펫이 보이지 않는다. --- S# 40. 약국 앞 - 밤 현우와 재일이 함께 걸어가다가 약국 셔터를 내리고 있는 수연을 본다. 다가가 인사하는 현우. 인사를 받아주는 수연. 수연 : 어, 재일이구나. 재일 : 우리 선생님이에요. 수연 : … 어, 그래. 현우 : 도와드릴까요. 쇠꼬챙이로 셔터를 끌어내리는 수연을 도와주는 현우. 사실 누가 도와주지 않아도 그녀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일이다. 뭔가 어색한 기분의 현우. 수연이 내려놓은 비닐봉지를 들어 준다. 수연 : (셔터를 다 내리고 돌아서며.) 감사합니다. 현우 : 문을 일찍 닫으시네요. 수연 : …… 아, 그거. 봉투를 건네는 현우. 현우 : 저기…. 수연 : (말을 자르면서.) 속은 괜찮으세요. 현우 : 예. 수연 : (가볍게 목례하며.) 재일이 집에 가니. 재일 : 네. 수연 : 그래, 그럼 누나 좀 집에 바래다줄래. 재일 : 네. 서둘러 자리를 뜨는 수연. 인사하는 재일이. 현우 : 어 그래…. 잘 가라. --- S# 41. 관악실 - 낮 교장, 당직(교무주임), 몇 명의 교사들이 연습실 뒤쪽에 쭉 늘어서서 관악부 아이들의 연주를 보고 있다. 잔뜩 긴장해서 연주를 하는 아이들. 실수투성이다. 왠지 검사를 받는 느낌도 들고 현우의 기분도 언짢다. 심벌즈는 중간에 휴지를 붙들고 손을 높이 치켜들면 지휘하던 현우 눈짓으로 다녀오라는 신호를 하고, 총알같이 튀어나가는 심벌즈. 연주가 끝난 후 실망스러운 표정의 교장. 당직과 다른 교사들은 내심 잘됐다 싶은 표정이다. 당직 : 대회나 나갈 수 있을지 모르겠네. 현우 : ……. 당직 : 기왕 시작한 거니 잘 좀 지도해보세요. 봄까지 애들 실력이 많이 안 늘면 대회는 포기해야지 뭐. 현우 : 예…. 나가는 교장과 교사들. 의기소침해져서 고개를 푹 숙이고 현우만 바라보는 아이들. 휴지를 들고 들어오던 심벌즈, 분위기가 안 좋자 조심조심 자리로 들어간다. 현우 : 표정들이 왜 그래. 걱정하지 마. 아이들 : ……. 현우 : 너희 음악이 좋아서 시작했지, 대회 나가고 상 탈려고 시작했어. 다른 거 뭘 바라고 음악하면 안 돼. 여전히 실망한 채인 아이들의 표정. 현우 : (씨익 웃으며.) 악장, 악보 모아둔 것들 있니. 악장 : 네. 현우 : 가져와 봐. 악장이 자기 악보집을 건넨다. 현우 : (악보를 훑어보고.) 이거 말고 총보 없어. --- S# 42. 건널목 - 낮 (비) 읍내에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악보뭉치를 머리 위에 얹고 뛰어서 건널목을 건너는데 재일이 할머니가 남의 가게 처마 밑에 앉아서 도시락을 먹고 있다. ‘아차!’ 하고 지갑을 꺼내 뒤져보는데, 이천원이 채 되지 못한다. 얼굴을 보일까 봐 고개를 돌리고 그 앞을 지나는 현우, 수연의 약국 안으로 들어간다. --- S# 43. 약국 안 - 낮 (비-눈) 현우, 들어와 옷을 털고 보면 아무도 없다. 현우 : 무슨 비가 이렇게 와. 겨울에…. 음악소리가 잔잔하게 들려오는 약국 안. 수연이 없자 나가려는 현우. 문을 열고 나가지만 비가 너무 많이 온다. 다시 들어오는 현우, 빗소리에 묻힌 약국 안에 음악소리가 낮게 들린다. 의자에 앉아 창밖을 보며 노래를 듣는 현우. 연희가 부르던 음악과 오버랩 된다. 눈을 감는 현우. 빗소리와 함께 머릿속에 떠오르는 선율… 점점 더 분명해진다. 악기 하나의 선율에서 몇 개가 차례로 더해지는 음률… 커진다. 소리를 느끼는데… 그만 깜빡 잠이 들어버리는 현우. 수연(소리): 오셨어요. 잠든 현우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는 수연. 눈을 뜨는 현우. 얼굴을 조금 돌린다. 현우 : 아, 네…. 비가 하도 와서… 좀 있다 가려고…. 수연 : 비요. 현우 : 네…. 밖에…. 돌아보면 창 밖은 온통 눈 세상이다. 펑펑 퍼붓고 있는 함박눈. 사람들 즐겁게 눈을 맞으며 다니고, 수연도 눈을 털어내고 있다. 현우 : 어? 아까 비 왔는데…. 수연 : 무슨 비가 와요. 아까부터 하루 종일 눈이 왔는데…. 현우, 멍하게 창 밖만 본다. 수연 : 여기는 겨울이 일찍 와요. 눈도 엄청 오고요. 눈 좋아하세요. 현우 : ……. 창을 통해 비친 현우의 얼굴에 하염없이 내리는 눈. 그런 현우를 바라보는 수연. 현우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재일이 할머니가 눈을 맞으며 위태롭게 걸어간다. --- S# 44. 자취방 - 밤 현우가 앉은뱅이 책상에 앉아 악장에게 받은 총보를 꺼내놓고 대충 훑어보고 있다. 눈으로 대강 대강 보는데, 눈으로 지나가는 음표들이 마음속에 연주된다. 처음엔 희미하게 들리던 선율이… 짧고 선명하게 이어진다. 맘에 안 드는지 계속 훑어나간다. 그럴 때마다 계속 바뀌는 연주곡들. 메들리처럼 이어진다. 물에 젖어 엉켜있는 음표들. 소리도 따라서 엉킨다. 짜증이 나는지 악보를 치우는 현우. 엉켰던 불협화음들도 따라서 멈춘다. --- S# 45. 재일이 집 - 낮 하얗게 눈이 내린 도계의 풍경. 현우와 심벌즈가 어디론가 가고 있다. 현우 : 아직 멀었냐. 심벌즈 : ……. 골목에 줄지어 선 광산 사택들. 동네가 좀 을씨년스럽다. 심벌즈 : 여긴데요. 벨을 눌러도 대답은 없고, 현관문이 열려있다. 들어가는 현우와 심벌즈. 빛이 들어오지 않아 어두운 집안. 희미한 빛만이 어디가 방이고 어디가 부엌인지 가늠하게 해준다. 현우 : 스위치가… 어딨냐. 심벌즈 : 재일아…. 재일아…. 스위치를 올려도 불이 들어오지 않는 재일이 집. 라이터를 켜고 둘러보면, 재일이 것으로 보이는 앉은뱅이 책상 위에 초가 놓여 있다. 초에 불을 붙이는 현우. 초라한 방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라면 먹다 그대로 둔 그릇들. 부엌에 쌓여 있는 라면 박스들. 현우 : ……. --- S# 46. 병원 - 낮 병실 안을 들여다보는 현우와 심벌즈. 한쪽 침대에 할머니가 잠들어 있고, 재일이는 만화책을 보고 있다. 심벌즈가 들어가 재일이를 불러낸다. 현우를 보고 힘없는 미소를 짓는 재일이. 복도 의자에 앉아 있는 세 사람. 현우 : 언제 이러셨니. 재일 : 눈 많이 오던 날이요. 눈에 미끄러져서. 현우 : … 밥은 먹었어. 재일 : 네. 간호사 누나가 줬어요. 현우 : ……. 너무 걱정 마. 금방 나으실 거야. 재일 : 네. 현우 : …… 연습 많이 했어. 재일 : (쑥스럽게.) 아뇨. 카센터의 주호가 어느 노인을 부축해 복도를 가로지른다. 지나가며 현우와 가벼운 눈인사를 나누는 주호. 재일이도 심벌즈도 인사를 한다. 수납창구. 창구직원 : 보호자세요. 현우 : 네…. 창구직원 : 아직 퇴원을 못하시거든요. 입원비가 지불이 안 돼서…. --- S# 47. 거리 - 밤 병원을 나서는 현우와 심벌즈. 말없이 걷는다. 현우 : (담배를 물고 불을 찾다가.) 불 좀 있냐. 심벌즈 : ……. 뒤적뒤적 다시 라이터를 찾는 현우. “울면 안 돼 울면 안 돼 산타 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요.” 저 멀리 캬바레 입구에 세워져 있는 조잡한 크리스마스트리에선 불빛들이 반짝이고, 그 옆 모니터에선 캐롤도 들려온다. 현우 : 이런… (참으려다가.) 나 욕해도 되냐. 심벌즈 : … 하세요. 현우 : (담배연기만.) 후…. 담배 연기를 뿜는 현우의 눈에 들어오는, 전에 보았던 캬바레 구인광고. 전봇대에 붙어서 나풀거리는 광고지. 캐롤이 흘러나오는 캬바레 쪽을 돌아보는 현우. --- S# 48. 파라다이스 캬바레 안 - 밤 손님이 몇 없는 아직 한산한 캬바레. 한쪽 탁자에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와 현우가 마주 앉아 있다. 그곳의 모든 분위기가 몹시 어색한 현우. 사장 : 아니 뭐… 돈을 미리 땡기는 건 문제가 아닌데…. 이런 데 경험도 없다면서. 내가 실력을 봐야 뭘 결정을 하지…. 현우 : ……. 사장 : (웨이터에게.) 야, 이리 와 봐. 이 친구 옷 좀 입혀서 무대에 세워봐. 난처한 표정의 현우. 알록달록 반짝반짝 무대의상을 입고 무대 한쪽에 올라가 색소폰을 드는 현우. 뒤의 밴드와 몇 마디 나누고는 조심스럽게 연주를 시작한다. 어색하게 시작해서 점차 흥겨운 트로트를 제대로 연주해내는 현우. 처음에 낯설어하던 손님들도 어느새 음악에 빠져들고, 미심쩍은 표정으로 지켜보던 사장의 얼굴도 만족스런 미소로 바뀐다. --- S# 49. 재일이 집 - 밤 불이 환하게 켜진다. 재일이가 할머니를 모시고 들어오고, 밀가루며 쌀자루를 용석이와 심벌즈, 악장이 날라다 구석에 쌓아놓는다. 할머니는 따뜻해진 전기장판을 만져보며 좋아서 어쩔 줄 모른다. 현우의 손을 잡아 주는 할머니. 현우는 그 인사가 어색하다. 문밖까지 배웅을 나온 재일이. 돌아가는 현우도 발걸음이 가볍다. --- S# 50. 약국 - 밤 약국 안을 기웃거리는 현우. 웬 젊은 남자 하나가 수연 앞에서 서성대고 있다. 어색하게 무슨 말인가 자꾸 거는 듯하지만 수연은 별 대꾸가 없이 난처한 표정만 짓는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왠지 이상하다고 느끼는 현우. 젊은 남자가 수연에게 수작을 부리는 듯하다. 문을 열고 약국 안으로 들어가는 현우. 현우 : (수연에게 좀 크게.) 안녕하세요. 수연 : 예… 안녕하세요. 남자가 돌아서는데, 주호다. 어색하게 엇갈려 지나가는 현우와 주호. 수연의 표정이 이상하다. 눈이 부은 것 같기도 하고 얼굴이 몹시 어둡다. 현우를 힐끔 보고는 약국을 나가는 주호. 현우 : … 아는 분이에요. 수연 : 예…. 현우 : 나도 한번 봤어요. 카센터에서. 사람 참 서글서글하던데…. 수연 : 이 동네에서 유명한 깡패예요. 현우 : 그래요. 왜. 뭐. 돈 뜯으러 온 거예요. 수연 :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현우 : 조심하세요. 괜히 혼자 있다가 큰일 나지. 씩 웃기만 하는 수연. 현우 : 남자들 조심해야 돼요. 아저씨들도 마찬가지고…. 수연 : (가벼운 미소로 넘기고.)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현우 : 아… 소화제 좀 주세요. 수연 : 저번에 사가신 거 벌써 다 드셨어요. 현우 : 예. 아, 예… 맨날 맛없는 거 먹으니까 속이 안 낫네. 수연 : 밥을 해 드세요. 때 맞춰서. 안 그럼 그거 약도 없어요. ……. 제가 잘 아는 맛있는 집 있는데, 가실래요. 현우 : …. 수연 : 저는 소개만 하고요, 선생님이 사시는 거예요. --- S# 51. 횟집 - 흐린 오후 쓸쓸한 겨울 바닷가의 횟집에 앉아서 창밖의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현우와 수연. 허름하긴 하지만 음식 맛은 꽤 좋을 것 같아 보이는 집이다. 테이블 위에는 몸통은 온통 회를 쳐놨지만, 아직 살아서 이리저리 눈을 굴리고 있는 생선이 접시에 놓여있고, 몸통의 한 반쯤은 이미 두 사람의 뱃속으로 들어가고 없다. 수연 : 술 너무 많이 드시는 거 아니에요. 현우 : …… 난 있잖아요…. 전 남편, 헤어진 옛 남자친구, 그런 말들이 좋아요. 수연 : 왜요. 현우 : …… 내가 악당이잖아요. 수연 : ……. 현우 : ……. 수연 : …… 악당 노릇하기 어때요. 현우 : 원래 악당이 더 아픈 거예요. 악당이니까. 현우, 수연을 잠시 바라보는데, 수연이 입 모양으로만 “왜요?” 하며 앞으로 고개를 살짝 숙여 다가온다. 그 모습이 굉장히 귀엽다. 현우 : 여기 자주 와야겠네. --- S# 52. 바닷가 언덕 - 흐린 오후 겨울 바닷가가 보이는 언덕에 차가 세워져 있다. 그 근처가 아베크족들이 모이는 곳인 듯. 군데군데 언덕에 주차된 차들. 그 옆에는 바다찌꺼기가 달라붙은 팻말. 차 안에 앉아 바다를 보던 현우가 수연을 보면, 수연은 조금 떨어진 커피 자판기 앞에 서서 동전을 찾는데, 동전이 모자라는 모양이다. 다시 돌아오는 수연. 수연 : (문을 닫고 앉으며.) 100원이 모자라네요. 현우 : 수연씨는 옛날에 좋아했던 사람 없어요. 수연 : 왜 없겠어요. 현우 : 많이 좋아했어요. 수연 : ……. 현우 : ……. 창밖을 바라보던 수연을 쳐다보던 현우. 속으로 뭔가 생각하는 듯하다가,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의자를 뒤로 젖힌다. 현우 : 조금만 더 있다가 가요. 그러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건드렸는지 완만하게 경사진 언덕에 서 있던 차가 슬슬 앞으로 가더니 앞차를 쿵 받아버린다. 수연 : 어머…. 앞차에서 나오는 남자. 자기 차 뒤를 확인하더니 현우 창 쪽으로 와서 삐딱하게 선다. 약간 술에 취한 남자. 남자 : … 아저씨. (둘을 힐끗 보고는.) 아가씨랑 재미 보는 중이었나 본데…. 참 나…. 왜 이래요. 에이. 나 오늘 기분도 좆같은데…. 현우 : 죄송합니다. 그 남자가 내린 차창으로 짙은 화장의, 입술이 번진 여자 얼굴이 쑥 나오더니 그 남자 쪽을 향해 소리친다. 여자 : 오빠 그냥 와. 남자는 그 여자를 한번 돌아보고 다시 현우와 수연을 바라보더니 다 귀찮은 듯 손으로 됐다는 표현을 하고는 자기 차로 돌아간다. 어색하게 앉아있는 두 사람. --- S# 53. 수연 집 앞, 언덕 - 해질녘 언덕 아래에 서 있는 현우의 차. 언덕을 걸어 오르는 두 사람. 현우 : 집이 여기 위예요. 수연 : 네…. 언덕을 오르는데 색소폰 소리가 들린다. 성당이 내려다보이는 그 곳. 경사진 길을 따라 언덕에 거의 올라왔을 때 눈앞에 보이는 것은, 한껏 멋 부리며 색소폰으로 연주를 하고 있는 용석이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수정이. 용석이 연주하는 것은 수연의 약국에서 몇 번 들었던 그 음악이다. 현우 수연 일행이 좀 더 다가가자 그제야 알아챈 용석이, 연주를 멈추고 굳어버린다. 현우 : (씨익 웃으며.) 연습 잘 되냐. 폼 잘 잡았어. 용석이의 가방을 깔고 앉아있던 수정이도 인사한다. 볼이 빨개져서는 조금 당황하는 어린 연인들. 현우 : 괜찮아. 용석 : ……. 수정 : (용석이에게.) 야… 가자…. 현우 : 갈래. 용석 : ……. 수정 : 안녕히 계세요. 둘이 민망한 듯 서둘러서 내려가고 그 둘을 재밌게 바라보는 현우와 수연. 현우 : 저 곡 좋아하죠. 수연 : ……. 현우 : 약국 가면 맨날 저거 듣길래…. 수연 : 부럽다…. 선생님도 저런 적 있으시죠. 나한텐 저런 거 누가 안 불어주나…. 현우 : 나중에요…. 나팔을 서울에 두고 왔어요. 수연 : …… 해 본 소리예요. 조심해 들어가세요. 현우 : 그럼 갈게요. 수연 : 어, 잠깐만요. 현우가 처음 이 언덕을 넘어 도계로 들어올 때 보았던 바로 그 가로등 밑 자판기로 가서 커피를 뽑는 수연. 수연 : 아까 못 먹은 거. 여긴 100원 싸거든요. 현우 : (한 모금 마신다.) …. 수연 : 어때요. 현우 : 오늘은 맛있네요. 수연 : ? 언덕 아래 서 있는 성당 너머로 펼쳐진 읍내 풍경. 멀리 읍내를 둘러싼 산줄기 너머 오렌지 빛으로 저무는 도계의 하루. 읍내의 가로등이 하나 둘씩 들어오기 시작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들고 바라보고 있는 현우. 그런 현우를 바라보고 있는 수연. --- S# 54. 관악실 - 낮 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 온갖 냄새가 진동을 한다. 현우 : 어휴 냄새…. 창문 좀 열어라. 아이들 일어나 창문을 연다. 그제서야 둘러보면, 바닥에 두런두런 앉아 도시락을 먹고 있는 아이들. 그 중엔 컵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도 보이고. 보온 도시락 아닌 일반 도시락을 내놓고 있는 재일이. 현우 : 용석인 어디 갔어. 땡땡이 친 거야. --- S# 55. 거리 - 밤 크리스마스 이브, 밤늦은 거리. 화려하진 않지만 제법 들뜬 분위기. 바싹 줄여 입은 바지에 머리엔 무스를 잔뜩 바른 용석이가 수정이와 수다를 떨며 지나고 있다. 파라다이스 캬바레 앞, 입구 양쪽의 모니터에서 흘러나오는 끈적거리는 색소폰 연주에 흥미를 보이는 용석. 수정 : 용석아, 너도 저렇게 불 줄 알어? 용석 :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당근이지. 저런 건 누워서도 분다, 씨…. 모니터 속 연주자의 모습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수정. 수정 : 어… 저 사람, 그때 그 선생님 아냐? 용석 : … 수정아, 너 먼저 가라. 용석, 서둘러 캬바레 입구 계단으로 들어서서 둘러보다가 십대후반의 웨이터를 발견한다. 용석 : 형! 형! 용석이를 돌아보고 아는 척 하는 웨이터 ‘원빈’.
S# 56. 파라다이스 캬바레 안 - 밤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장식들, 현수막. 무대 위 현우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원빈의 안내를 받으며 술 마시고 춤추는 사람들 사이를 지나 한쪽 구석에 자리를 잡는 용석. 꽤 진지한 모습으로 연주에 몰입하고 있는 현우, 현란한 조명 받으며 이어지는 현우의 연주에 용석이는 넋을 잃을 지경이다. 연주가 끝나고 객석을 향해 인사하던 현우, 한쪽 구석의 용석을 발견한다. --사이-- 캬바레 연주자 대기실. 묘한 표정의 용석을 앉혀놓고 분위기를 잡고 있는 현우. 용석 : 돈 때문에 음악하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선생님이 이런 데서 뭐하세요? 현우 : 용석아…. 내가 이걸 하는 거는, 그러니까, 선생님도 원래 이런 걸 안 좋아해… 근데, 그게… 용석 : ……. 현우 : 너 임마, 어제 왜 연습 빠졌어?
S# 57. 은행 - 낮 농협으로 들어가는 현우, 추워서 밖에 안나가고 현관 안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들, 전화소리들…. “어, 나 금방 들어가…” “뭐 사갈까? 알았어… 그래…” “그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걸려있는 농협 일력. 12월 31일. 현우, 현금지급기 앞에 서서 카드를 넣고 잠시 멈추었다가… 비밀번호를 누른다. 비밀번호 현금지급기에서 돈을 세는 소리가 들리고…. 돈을 들고 바라보는 현우. 만원짜리 뭉치가 두둑하다.
S# 58. 자취방 - 밤 라면을 끓여가지고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는 현우. 뜨거워서 호들갑을 떤다. 한쪽 벽에 기대고 앉아 라면을 먹는 현우. TV에서는 불우이웃돕기 특집 프로그램이 진행 중이다. 무료급식으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수를 받아서 길 한쪽에서 먹는 모습들. 그릇을 한쪽 손에 들고 국수를 먹는 자세가, TV 뒤 거울에 비친 현우 자신의 모습과 정확히 똑같다. 입에 넣으려던 라면가락을 다시 내려놓는 현우. 자기 신세가 한심스럽다. 거울 속의 자신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울리는 전화. 거울 속에서 전화를 받는 현우. 현우 : (발신자 확인하며.) 어, 엄마. 엄마 : 너는 전화두 없니? 현우 : 어… 일이 계속 있어서 시간이 잘 안 나네…. 엄마 : 떡국도 못먹구…. 현우 : 잘 먹어요. 떡국, 맛두 없는 거 먹어서 뭐해. 엄마두 집에 있지만 말구 노인정두 가구 그래.. 엄마 : ㄴㅇㄹㅇ… 나ㅓ롸ㅓㄴㅇ…. 현우 : 여보세요? 엄마 : ㄴㅇ…ㅓ로… 녈고…. 현우 : 엄마… 엄마… 안 들려? 끊어. 다시 걸게, 내가…. 다시 거는 현우. 신호가 가는데 한참을 안받는다. 전화 받는 소리. 현우 : 왜 이렇게 안 받어? 상대방 : ……. 현우 : …… 여보세요. 연희 : 왜 걸었어? 현우 : ……. 연희 : …… 오빠. (왜 대답 안하냐는.) 현우 : 어…. 생일 축하한다. 뭐 선물 좋은 거 많이 받았냐? 연희 : 그거 궁금해서 걸었어? 현우 : …… 준비는 잘 돼가니? 연희 : 응…. 현우 : 그래…. 잘됐다…. 창밖을 보는 현우. 눈발이 조금 날리기 시작한다. 현우 : …… 연희야. 연희 : …… 응? 현우 : (진심으로.) 행복해라… 꼭…. 연희 : …. (부드러워지는.) 오빠…. 무슨 일 있어? 현우 : 아니. 일은 무슨 일…. 연희 : … 오빠 지방 내려가 있다면서? 현우 : 그렇게 됐어. 연희 : 밥은 잘 먹어? 현우 : 그럼. 연희 : 누구랑 먹을 사람은 있어? 현우 : 응… 아까 애들 와서 같이 먹었어…. 연희 : 애들? 현우 : 응. 나 여기서 애들 가르쳐. 연희 : 그래? 잘됐네…. 좋다…. 현우 : … 연희야… 새해 복 많이 받아라. 그럼 끊자… 잘 자. 연희 : … 오빠두 새해 복 많이 받어. 현우 : … 응. 그래 끊자. 연희 : 알았어…. 현우 : … 먼저 끊어. 연희 : … 응. 딸각. 끊어진 전화를 들고 한참을 있는 현우.
S# 59. 도계 - 밤 (눈.)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에도 변함없이 조용하고 어두운 도계의 밤. 현우집 앞 가로등 밑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눈송이들. 트럼펫으로 연주되는 “올드 랭 사인”이 어디선가 들려온다.
S# 60. 현우 자취집 - 아침 잠들어 있는 현우.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 힘들게 일어나는 현우. 쾅쾅쾅… “선생님.”
S# 61. 재일이 집 - 아침 조그만 밥상 주위에 현우, 재일이, 재일이 할머니가 둘러앉았다. 국자를 들고, 가운데 올려진 누런 냄비에서 한 그릇씩 떡국을 뜨고 있는 재일이. 각기 다른 모양을 한 세 개의 그릇. 반찬은 김치 하나. 부실한 모양새, 하지만 왠지 맛있어 보이는 떡국에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현우 : 우와~ 아니, 몸도 안 좋으신데…. 할머니 : 많이 드세요. 선생님. 딴 거 뭘 못 넣어서. 현우 : 딴 거 뭘 넣어요, 넣긴. 할머니 떡이 최고죠. 저희두 집에서 이렇게 먹어요. 먹음직스럽게 떠먹는 현우. 얌전히 떠먹는 재일이.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는 할머니. --사이-- 재일이 집을 나서는 현우, 재일이가 뒤따라 나온다. 현우 : (주머니에서 뭘 꺼내며.) 이거…. 그때 그 곡 악보. 재일 : 아, 고맙습니다…. 현우 : 너한테 맞게 좀 고쳤어. 재일 : 네? 현우 : (장난스럽게.) 이 곡이 원래 성인용이었거든…. 재일 : (웃으며.) 네…. 현우 : 재일아, 너 나한테 세배 좀 해봐라! 재일 : 네? (큰절을 해야되는 건지 잠시 고민하다가 크게 고개를 숙이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현우 : 자… 세뱃돈 줘야지. 올해에는 연습 더 열심히 해라. 현우, 메고 있던 불룩한 가방 안에서 차에 있던 테입과 만원짜리 한 장을 꺼내 재일이에게 건넨다.
S# 62. 언덕 - 저녁 난간에 앉아서 기다리는 현우. 수연이 옆에 와서 앉는다. 수연 : 어디 가죠? 여긴 갈 데도 없는데. 현우 : 그냥 좀 걷죠 뭐. 약국은요? 수연 : 새해 첫날 문 여는 약국이 어딨어요. 현우 : 그래두 아픈 사람 있을 텐데…. 수연 : (현우를 가리키며.) 아픈 사람 여기 있잖아요. 현우 : ……. 수연 : 누구랑 점심은 드셨어요? 현우 : …… 여자들은 왜 그런 걸 물어봐요? 수연 : 누가 또 그런 거 물어봤나보죠? 현우 : (미소.) …. 멀리 기차 역사에 불이 들어온다. 현우 : 기차 타본지도 오래됐네…. 수연 : ……. S# 63. 기차 밖 풍경 - 낮 하얀 눈밭을 지나는 기차. 창 밖을 스쳐가는 것들을 바라보면 천천히 떠오르는 선율. 가볍게 고개를 흔들어 보는 현우. 선율이 조금 바뀌며 경쾌해진다. 기차가 다리를 건넌다. 날아가는 기차. S# 64. 현우네 옛 동네 - 밤 현우, 추워서 고개를 숙이고 걷고 있다. 옷깃을 여미고 바쁜 걸음으로 가는 현우. 골목길을 돌면 아직 불이 켜진 가게. 호빵 기계 옆에 작은 눈사람이 하나 서 있다. 정겨운 동네 풍경. 집 앞에 서서 벨을 누르려고 하다가 뭔가 이상한 현우. 주위를 둘러본다. 이사 간 옛날 동네에도 눈이 많이 왔었나보다. S# 65. 현우네 새 집 - 밤 열쇠를 열고 들어오는 현우. 소파에 잠들어 있는 엄마. TV는 저 혼자 돌아가고 있다. 애국가라도 나오는… 방안으로 들어오면 책상에 교통위반 딱지들이 수북히 쌓여있다. 몇 장을 뜯어보다가 서랍 속에 넣어 버리는데 그 중에 어떤 여자와 찍힌 사진. 현우 옆에 앉은 여자의 얼굴이 까맣게 가려져 있다. 사진을 잠시 보고 앉은 현우. S# 66. 현우네 새 집 - 아침 옷을 차려입고 나오는 현우. 트럼펫 케이스를 어깨에 메고 있다. 엄마가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다. 김이 나는 국도 놓여있고, 깻잎, 계란찜, 김치 등이 놓은 아침 밥상. 그 옆에 반찬통이 여러 개 탁자 위에 놓여 있다. 엄마 : 일어났니? 너 오는지두 모르구 깜빡 잠이 들었네…. 밥 먹어. (현우 얼굴을 보며.) 왜 그렇게 얼굴이 홀쭉하니…. 현우 : 나 그냥 가야 돼 엄마…. 시간 없어. 나팔 가지러 온 거야. 엄마 : 그래두 먹구 가…. 현우 : 안돼…. (신발을 신으며.) 기차시간 있어서 가야 돼. 전화할 게 엄마. 엄마 : 얘, 그럼 저거 반찬이라도 가져가. 다 싸놨는데…. 응?
반찬통을 싸들고 엘리베이터를 따라 타는 엄마. 현우 : 그거 가져가기 무거워. 엄마 : 별일 없는 거지? 엄마가 갈까 한번? 현우 : 거길 엄마가 어떻게 와. 조금 있으면 올 텐데 뭐. 참!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며.) 월급 받았거든…. 이거 엄마 용돈. 엄마 : (손사래를 치며.) 아이구 됐네, 너 쓸 돈도 없을 텐데…. 현우 : (억지로 쥐어주며.) 받어. 엄마는 더 이상 얘기 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아는지 그냥 가만 계시다. 현관까지 따라 나온 엄마. 하얀 돈 봉투를 들고 선 엄마. 현우 : (가게 앞 나무를 문득 돌아보며.) 저거 무슨 나무야? 엄마 : (같이 보며.) 글쎄…. 겨울이라… 나두 모르겠네. 봄 되고 꽃이 피어봐야 알지…. S# 67. 관악실 - 낮 재일이 혼자 벽 앞에 선 채 뭔가를 보고 있다. 아무도 없는 관악부. 현우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현우를 보고 꾸벅 인사하는 재일. 혼자 연습이라도 했는지, 재일이 손엔 트럼펫이 꽉 쥐어져 있다. 현우 : 연습했니? 재일 : 대회 포스터 나왔는데요. 현우가 재일이 옆으로 다가가보면, 빨간 연주복을 잘 갖춰 입은 어느 학교의 관악부 모습이 담겨있는 대회 포스터가 벽에 붙어있다. 포스터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현우. 그리고 재일. S# 68. 관악실 - 낮 진지하게 연습을 하는 아이들. 많이 좋아졌다. 제법 화음이 이루어지는 아이들의 연주. 용석이 자리는 비어 있다. 은빛 트럼펫을 옆에 놓은 현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으로. 현우 : (지휘봉을 흔들며.) 야 잠깐 잠깐. 지금 한 명 빠졌다고 이렇게 흐트러지는 거야? 아이들 : ……. 현우 : 악장, 용석이 왜 계속 안나오지? 악장 : ……. 심벌즈 : 아빠가 못하게 한대요. 현우, 다시 보면 악장과 심벌즈 모두 안대를 했다. 현우 : 너흰 또 눈이 왜 그래? 심벌즈 : 재일이한테 옮았어요. 현우 보면, 쑥스러워하고 있는 재일. 안대는 없다. 현우 : 그리고 너희들, 씽코페이션…, 씽코페이션이 뭔지 알아? 서로 쳐다보며 웅성대는 아이들. 현우 : 니네 좋아하는 여자 생기면 뭐 하고 싶어? 아이 1 : 극장가고 싶은데요? 현우 : 말고. 아이 2 : 손잡고 싶어요. 현우 : 비슷한데…. 약해, 약해. 아이 3 : 전… 뽀뽀하고 싶은데요. 아이들, 킥킥거린다. 현우 : 오 오…. 그래 하고 싶겠지. 근데 그거 말고, 재일 : 끌어안고 싶다. 현우 : 그래. 그거야. (손가락을 가리키며.) 가까이 끌어당기고 싶잖아. 그럴 때 내가 저 여자를 씽코페이션 하고 싶다…. 그러는 거야. 니들 연주에서는 그게 빠졌어. 자 그 느낌을 살려서 다시 한 번. 장난스런 표정은 다 어디 가고 진지하게 연주에 몰두하는 아이들. S# 69. 약국 - 밤 셔터가 내려진 약국. 불 꺼진 어두운 약국 안엔 빨간 전기난로 하나가 빛을 내고 있고, 그 옆에 현우와 수연이 커피 잔을 들고 둘러 앉아있다. 수연 : 한때는 상도 잘 타고 그랬는데…. 지금은 아예 인원도 모자라고…. 현우 : ……. 수연 : 관악부만 그런 게 아니고 학교 자체가 그런데요 뭐. 현우 : ……. 수연 : 해가 다르게 사람들이 빠져나가니까…. 현우 : (듣고만 있다가.) 수연씬 어때요? 수연 : 네? 현우 : 떠나고 싶은 마음 없어요? 수연 : ……. 현우 : 아버지도 탄광에 안 나간지 꽤 되셨다면서요. 수연 : (웃음 띤 얼굴로.) 글쎄요…. 언젠간 검은 산이 미워질 수도 있겠죠…. 현우 : ……. 수연 : 참…. 집엔 잘 갔다 오셨어요? 현우 : 네. 수연 : …… 만날 사람들 다 만나고 왔어요? 현우 : ……. S# 70. 거리 - 밤 수연을 데려다 주고 오는 현우. 트드득 트드득…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밤거리를 달리는 현우의 차. 차도 한복판에 두 사람이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술에 취해 몸을 못 가누는 아버지와 실랑이를 하고 있는 용석이다. “아버지… 좀 일어나 보세요…” “야, 이불 깔어!” “아버지!” 현우가 차를 세우고 다가가면, 보고 인사하는 용석. 현우 : 아버님이셔? 용석 : … 예. 현우 : 약주를 많이 하셨구나. 길바닥으로 쓰러져 버리는 용석의 아버지. 난감해 하는 용석과 현우. S# 71. 좁은 길 - 밤 차가 올라올 수 없는 좁고 가파른 길. 차를 세워두고 용석의 아버지를 엎고 오는 현우. 무거운지 땀을 뻘뻘 흘리며 힘들어하는 현우. 용석은 미안해 어쩔 줄 모르겠으면서도 현우가 마냥 고맙다. 현우 : … 너 아버지 업어본 적 있니? 용석 : ……. 현우 : 생각보다 무거우신데? 아이고…. 용석 : 괜찮으세요? 현우 : 그럼…. 아버지가 못하게 하시니? 용석 : … 네. 현우 : … 왜? 용석 : 헛바람 더 들기 전에 공부해서 상고 가래요. 현우 : … 그래…. 그것두 좋아. 그래두 돼. 용석 : 싫어요. 현우 : 음악 계속 하구 싶어? 용석 : 네…. 현우 : 왜? 케니 지? S# 72. 탄광 목욕탕 전경 - 낮 옷을 벗고 목욕을 하러 들어가는 광부들의 탈의실 전경. 계장 : 천수형님~ 천수형님~ 손님 오셨어요. 사람들을 둘러보는 현우. 용석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고 대신 검은 얼굴을 한 사람들이 궁금한 눈빛으로 현우를 돌아본다. 목욕탕으로 들어가는 계장. 현우도 따라 간다. ‘천수형님’을 외치는 소리에 자욱하게 끼어있는 수증기를 뚫고 누구 한명이 다가온다. 용석부 : 누가…. 옷을 다 벗은 채로 다가오는 용석 아버지. 현우 : 안녕하세요. 저 용석이 관악부 지도교사입니다. 용석 아버지, 왜 왔는지 알겠다는 표정을 짓지만 까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악수를 건네는 손. 현우가 슬며시 손을 건네면 덥석 잡아 버린다. 지나가던 주호, 용석 아버지에게 인사한다. 용석부 : 어 그래. 거기두 인원보충 아직 안됐니? 주호 : 네. 아직…. 용석부 : (현우에게.) 요 밖에서 잠깐 기다리슈. 내 금방 씻고 올 테니까. 현우 : 네. S# 73. 사무실 옆, 테이블 - 낮 깨끗해진 모습의 용석 아버지와 주호가 나온다. 그제서야 주호를 알아보고 인사하는 현우. 주호 깍듯하게 인사한 후에 갈 길을 가고. 용석부 : 참 요즘 보기 드문 놈이야. 저놈이. 화나면 성질이 지랄 같아 그렇지. 저 놈이 저러구는 가서 카센타도 한다니까. 잠깐만 있어 봐요. 벤치에 앉아 기다리는 현우. 잠시 후 종이컵 두개와 소주 댓병, 김치 한 종지를 가져오는 용석 아버지. 용석부 : 저 안에 들어갈 때 말야. 인차를 타고 들어가거든? 저거 보이지 노란색 차. 저 안에서 사람들이 그래요. 인생은 30세 때는 30키로, 40에는 40키로, 50에는 50키로로 간다구. 용석이 그 놈, 지금 어릴 때 저렇게 지내다가 어느 날 이게 아니었나부네 싶으면 늦은 거 아닙니까? 현우 : 네…. 근데 용석이는 소질이 있습니다. 용석부 : 소질…. 나도 있었지. 나도 안 해 본 거 없어요. 용석이가 얘기 합디까? 나도 연주생활을 좀 해봤어. 부산에서…. 악기라고 잡아본 건 밤무대 몇 년 해본 게 다지만…. 그래서 내 좀 알아요. 음악이란 거…. 좋지…. 술에 취해 가지구 집에 들어와서 용석 에미한테 나팔을 불어주면 술주정을 집에까지 와서 하냐고 하면서도 좋아했지. 글쎄 그 재미로 나 같은 놈한테 붙어살았는지도 모르지만…. 호강한번 못해보고 그렇게 살다가 저거 하나 낳고 죽었어. ‘부’짜가 들어가는 직업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닌 거예요. 파출부… 청소부… 잡부… 광부! 용석이 녀석은 ‘사’짜 들어가는 직업을 갖게 하고 싶어요. 검사… 의사… 박사… 안 되면 최소한 장사라도 해야 할 거 아니요. 장사! 현우 : 악사…. 용석부 : (현우를 째리며.) 내가 두려운 게 뭔지 아쇼? 저 놈이 클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거요. 저 놈 클 때까지는 옆에 있어줘야지. 그게 내 지금 하나 남은 바램이요. 그래도 이런 아버지지만,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나을 테니까. 현우 : 아이의 꿈을 꺾으시면 꼭 그렇지도 않죠…. 용석부 : 꿈?… 선생님은 꿈이 뭡니까? 현우 : 예? 용석부 : 하긴, 선생님은 훌륭한 부모님 만나서 곱게 자라면서 꿈을 이룬 거겠지. 우리 같은 놈들은 꿈도 가려서 꿔야지. 나도 꿈이 있었지. 막장 인생이 내 꿈은 아니었거든. (꿈을 꾸는 눈빛으로 소주를 마시며.) 꿈꾼다고 다 이루어집디까? 자식 생각 부모보다 더 하는 사람 있습디까? 우리 애는 보내지 않을 테니 그리 아쇼. 내 미안해서 그러니, 이거나 한잔 더 하구 갑시다. 현우 : ……. S# 74. 거리 - 낮 (눈.) 학교 밖에 서서 현우를 기다리는 용석. 안대를 하고 있다. 눈 쌓인 거리를 걷는 선생님과 학생. 현우와 용석이다. 문 닫힌 약국도 지나고, 약국 안을 용석이 몰래 들여다보고. 길 건너 떡 팔고 있는 재일이 할머니도 보고, 철길도 지나고… 눈이 다시 내리다가 그쳤다가… 그러면서 쭉 이어지는 현우와 용석의 대화. 현우 : 이번엔 너야? 용석 : (눈이 간지러운지 긁적긁적.) ……. 현우 : 에이 정말…. 드럽게. 용석 : 뭐 어때요? …치. 어떻게 됐어요? 현우 : 니네 아버지… 만나뵈니까 누군지 알겠더라. 지난번엔 깜깜한 밤이라 그리구 술을 너무 많이 드셔서 얼굴을 잘 못 알아봤는데…. 용석 : 예? 현우 : 옛날에는 아주 유명하셨던 분이야. 용석 : 그래요? 현우 : 응…. 알만한 사람은 다 알지. 암스트롱의 ‘헤븐스 도어’라는 곡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그 곡을 제대로 연주하는 사람은 딱 한명밖에 없다고들 했거든…. 바로 니네 아버님이야. 용석 : (흐뭇해서 웃으며.) 난 다 뻥인줄 알았는데…. 현우 : 야… 누가… 아버지가, 아들한테 뻥을 치는 아버지가 어딨냐? 용석아…. 아버지 말씀두 일리가 있더라구. 난 아버님이 용석이 너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줄 몰랐어. 그냥 반대만 하시는 줄 알았는데…. 선생님이 할 말이 없더라. 용석 : ……. 현우 : 공부 열심히 해서 다른 일하면 좋지 뭐. 선생님 봐. 여기 와서 이러고 있잖니? 용석 : 여기가 뭐 어때서요? 현우 : 어… 무슨 말이냐면. 그게 말야…. 너 여자친구 맛있는 것두 사 주구, 선물두 펑펑 해주구 그러구 싶지 않니? 근데 음악하면 그게 잘 안되거든. 케니 지가 아무나 되는 게 아니야. 상고 가서 장사하면 돈 잘 벌잖아…. 수정이두 그런 거 원할 걸 아마? 용석 : 그런 게 뭐 중요해요. 나 그래서 때려쳤어요. 수정이. 현우 : 뭐? 왜? 용석 : 나보다 나이두 한살이나 많은 게 맨날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연습하는데 만나자구 전화하구…. 칭얼거리기나 하구, 뭐 사달라 그러구, 뭐 없다구 짜증내구. 내가 뭐 재벌집 자식이에요? 광부집 자식이지! 현우 : 그치… 넌 광부집 자식이지. 야, 그래두…. 얼마 전까지만 해두 좋다구 나팔두 불어주구 그러더니 고새 맘이 바뀌어서 여자를 버리냐? 남자가 그럼 안 되지. 안 그래? 용석 : 버리긴 뭘 버려요. 무슨 물건이예요, 수정이가…. 현우 : … 그치… 맞아 니 말이…. 너 있잖아, 그래두 그럼 안돼…. 다시 한번 생각해봐. 이 놈아! 그래도 니가 좋아서 그랬으면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냐, 남자가. 용석 : 글쎄… 책임을 질수가 없다니까요! 무슨 책임을 져요. 제가 뭘 어쨌다구요. 현우 : 그렇다고 그렇게 마음이 확 확 바뀌냐? 용석 : 나는 그렇게 돈 많이 드는 애를 만날 수가 없다니까요. 선생님이 용돈 주실래요? 현우 : 그럼 수정이를 설득 해보든지. 그 애도 너 좋아하던 눈치던데. 용석 : 그리고 걔는 다리도 너무 짧아요. 현우 : 야… 고새 또 뭐가 잘못 되가지구는…. 서로 쪼금 힘들다구 헤어지면 그게 사랑이니? 그래, 안 그래? 남자가 의리가 있지. 용석 : 근데 선생님 왜 그렇게 흥분하세요? 현우 : 어… 아니 그게 아니라…. 티격태격… 되지도 않는 소리를 해가며 용석을 달래보는 현우. 눈발이 다시 조금씩 날린다.
S# 75. 자취방 앞 - 낮 문 앞에 엄마가 배낭을 맨 채로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고 있고, 두 보따리나 되는 짐이 대문 옆에 놓여있다. 그 모습을 보고 짜증이 확 나는 현우. 현우 : (깜짝 놀라서.) 엄마! 엄마 : 어… 이제 오니? 현우 : 뭐 하러 왔어, 여기까지…. 추운데…. 엄마 : 너 밑반찬도 없고, 뭐 먹고 사는지도 모르고…. 현우 : (엄마 짐을 들며.) 이걸 다 어떻게 들고 왔어? 엄마 : 무겁니? 이리 줘. 그럼. 내가 들게…. 현우 : 됐어. (화 나는 걸 참으며.) 얼마 전에 갔다 왔잖아. 뭐 하러 와 오기를… 이 먼 데를. 에이 씨…. 엄마 : (또 뭘 내가 잘못했나, 쟤가 왜 또 저러나 싶은.) … 이왕 엄마가 왔는데 짜증 좀 안내면 안 되니? 엄마의 짐을 들고 투덜투덜 안으로 들어가는 현우.
S# 76. 자취방 - 밤 방안에 오붓하게 누운 엄마와 아들. 현우 : 내일 갈 거야? 엄마 : 가지 뭐해. 그럼. … 연희는 연락 없니? 현우 : ……. 엄마 : ……. 현우 : 엄마. 엄마 : 응? 현우 : 내가 첨에 음악 하겠다고 고집 부릴 때 어땠어? 속상했지?… 엄마 : 속상하긴… 그렇게 좋아해서 하겠다는데…. 아버지는… 니가 걱정이 되니까 괜히 그러셨던 거구…. 현우 : ……. 엄마 : 갑자기 왜? 애들 보니까 옛날 생각나? 현우 : 아니 그냥…. 엄마, 엄마는 어렸을 때 꿈이 뭐였어? 엄마 : 꿈? 꿈은 무슨… 먹고살기 바쁠 땐데…. 현우 : 그래도 어렸을 땐 무슨 꿈이 있었을 거 아냐…. 엄마 : (소녀 같은 얼굴로.) 엄마 학생 때, 글 잘 쓴다고 선생님 칭찬도 받고 그랬는데…. 시인이나 소설가도 되고 싶었고… 선생님도 되고 싶었고…. 그때 생각하면 뭐하니…. 니 아버지 만나서는…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었고…. 그 다음엔 너 하나 잘되는 게 꿈이었지…. 우리 아들이 선생님 돼서… 엄마 꿈 하나 대신 풀어줬네…. 어느새… 달빛에 비친 현우의 눈가가 살짝 젖어있다. 엄마 잠든다. 조용히 부엌으로 나가 엄마의 짐을 풀어보는 현우. 별게 다 나온다. 한도 없이 나오는 먹거리들. 소뼈다귀도 나오고, 김도 나오고. 김치. 콩자반. 보리차. 육포. 마늘 등등… 한없이 나오는 엄마의 꾸러미. 어떻게 저걸 다 들고 왔을까 싶다. 그리고 배낭에서 나온, 사진이 한 장씩 들어가는 조그만 엄마의 사진첩.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현우.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조금씩 표정이 부드러워진다. 사진을 보며 빙그레 웃는 현우. 중고등학교 때의 즐거운 모습들. 트럼펫 들고 친구끼리 장난치던 모습. 트럼펫 독주를 하는 모습. 환하게 웃고 있는 사진들이다. 그 사진첩 안의 모습 그대로 이어지면서…
S# 77. 관악실 - 낮 마치 사진 속 현우처럼 즐거운 아이들의 관악실 풍경들. 여느 때와 같이 까불고 장난치고 즐겁게 놀고 있는 모습.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우. 현우 : 뭐가 그렇게 즐겁니? 아이들 : 심벌즈가 너무 웃겨요. 와하하하… 고만 좀 해… 하하하하… 심벌즈, 애들 앞에서 귀여운 엉덩이춤을 추고 있다. 현우도 희미하게 웃는다. 현우 : 심벌즈야, 넌 뭐가 그렇게 좋니? 심벌즈 : (하소연하듯.) 용석이 땜에 대회는 다 글렀다구 애들이 너무 우울해 하잖아요. (혼날까봐 쫄은듯.) 그래서…. 아이들의 얼굴을 새롭게 바라보는 현우. 현우 : 너네 또 연주하고 싶다고 했지? 아이들 : 네!!!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눈동자. 연습을 시작하는 꿈꾸는 관악부.
S# 78. 풍경들 - 밤-낮 아이들 집 곳곳의 풍경. 각자 집에서 연습을 하는 아이들. 제 악기가 들어 갈 선율에 그 악기를 연습하는 아이들이 보이고. 심벌즈 대신 냄비 뚜껑을 들고 부딪쳐 보는 심벌즈. 북 대신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두드려 보는 북 소년. 관악실에서 혼자 색소폰을 불고 있는 용석… 별이 투명하게 맑은 밤하늘에서, 지상에 내린 어둠을 밝히는 작은 가로등 불빛들로. 그리고 지하 갱도를 밝히며 리듬에 맞추어 움직이는 광부들의 헤드램프의 불빛들이 이어진다. 갱도 안 좁은 휴게실에서도 검은 칠을 하고는 반찬을 나눠 먹으며 도시락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 하얗게 웃음을 지으며 얘기를 나누고 있다. 지상으로 나갈 채비를 하면서 인사하는 광부들이 인차 주변으로 모여든다. 노란색 인차가 덜컥 덜컥 출발하고… 아이들의 발걸음. 눈에 푹푹 빠지고 자빠지고… 그 사이사이 현우와 용석의 대화. “내 말대로 하자.” “아버지한테 맞아 죽지 않을까요…” “아버지한테 좀 맞으면 어때… 설마 아버지가 널 죽이기야 하겠냐?”
S# 79. 갱도 - 낮 (비.) 광부들을 싣고 나오는 노란색 인차. 주호도 보이고 용석이 아버지도 보인다. 하얀 입김들을 쏟아 내는 사람들. 멀리 어둠 끝에 지상으로 통하는 작은 빛줄기가 보이기 시작한다. 점점 다가오는 빛줄기. 그 빛을 타고 관악연주도 조금씩 들리기 시작한다. “이게 뭐여? 뭔 소리여?” 웅성웅성 하는 사람들. 인차를 타고 밖으로 나와 보면, 갱도 중앙 광장에서 아이들이 연주를 하고 있다. 아이들의 연주가 울려 퍼지는 중앙갱. 어떤 아버지들은 잠시 보다가 자기 갈 길을 가기도 하고, 또 어떤 아버지들은 모자를 벗고 아이들의 음악을 끝까지 들을 채비를 하기도 한다. 연주하는 아이들 하나하나의 면면… 조금 슬픈 듯 서정적인 음악. 현우의 지휘도 여느 때보다 힘차고, 심벌즈도 박자를 제대로 찾는다. 하늘에서 검은 비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이들의 연주를 보던 광부들의 얼굴에도 검은 비가 떨어지고, 묵묵히 아이들의 연주를 듣고 있는 사람들, 사람들… 사무실에서도 탈의실에서도 문을 열고 모두 모두 아이들의 음악들 듣고 있다. 용석이를 보고 있는 용석 아버지. 용석이도 힘차게 연주를 하며 아버지를 보고 있다.
S# 80. 자취방 - 낮 자취방 앞에 놓인 화분들. 엄마가 방을 나선다. 어제 저녁 해놓은, 들통 가득 들어 있는 곰국에서는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엄마 : 쓰레기통은 제 때 제 때 비워. 방에 냄새난다. 그리고 혼자 못 먹으면 애들 데려다 같이 먹어. 많이 해 놨으니까…. 알았지? 현우 : 알았어.
S# 81. 기차역 가는 길 - 낮 현우와 엄마가 온다. 기차역으로 가는데 재일이 할머니 있는 곳을 지나는 모자. 엄마 : 그냥 들어가. 엄마 여기서 가면 돼. 현우 : 괜찮아. 재일이 할머니 앞에 다가온 두 사람. 파란색 대야 안에 담겨 있는 온갖 종류의 색색가지 떡들. 지나가다가 떡들을 본 엄마는 그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구경을 하기 시작한다. 엄마 : 어머… 떡 색깔이 참 곱네요. 할머니 : (현우를 알아보고.) 아이구, 선생님 어머니 되세요? 엄마 : 네. 아세요? 할머니 : 그럼요. 아다마다요. 여기서 아주 유명하신 분이신데… 두 노인네의 닭살스런 대사가 낯간지러운지 현우는 엄마의 배낭을 들고 등을 돌려 서 있다. 엄마 : (기분이 좋아서.) 그래요? 할머니 : 내가 다 만든 거예요. 공장에서 만든 거랑은 맛도 틀려요. 엄마 : 이건 뭐예요? 할머니 : 그건… 바보떡. 아주 담백하고 맛있어요. 엄마 : 이건요? 할머니 : 그건 별슬기…. 엄마 : 음… 별게 다 있네요…. 얘, 이것 좀 사가지고 애들이랑 같이 먹어라. 현우 : 아, 됐어…. 무슨. 엄마 : 그러지 말고, 좀 가져가. 엄마가 사줄게. 할머니 : 그래요. 내가 싸줄게. 엄마 : 할머니 올해 어떻게 되세요? 할머니 : 죽을 때 다 되었소. 엄마 : 아직 정정하신데요 뭐. 할머니 : 어떻게 되셨수? 엄마 : 저는 엊그제 육순 지났어요. 할머니 : 아이구… 새댁이구먼 아직…. 엄마는 할머니의 말씀을 들어보란 듯이 현우를 돌아보고 수줍어 웃는다. 아직도 소녀 같은 엄마. 할머니 : 우리 같은 것들은 이리 가도 천하고, 저리가도 천한 거요. 어여 빨리 죽어야 할 텐데. 엄마 : 아유, 정말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그런 말씀일랑 다시는 하지 마세요. 좋은 세상 오래 사셔야지요. 요고랑 조고랑… 좀 넉넉히 싸주세요. 할머니 : (떡을 봉지에 담으며.) 오래살기는…. 요번 여름에 우리 착한 손주놈 하고 바다구경가기로 했는데, 그때까지만 살아도 고맙지…. 내가 빨리 죽어야 그 놈이 지 에미 찾아갈 텐데…. 엄마 : (글썽글썽.) 아이구, 왜 자꾸 그런 소리를 하세요, 할머니…. 돈을 건네는 엄마. 할머니 : (펄쩍 뛰며.) 아이고 내가 무슨 돈을 받아요. 아니에요…. 그냥 가져가세요…. 선생님한테 무슨 돈을 받아요. 절대 받을 수 없다는 할머니. 절대 받아야 한다는 엄마. 두 할머니가 실랑이를 하더니 돈을 떡 통에 넣고 도망 가버리는 현우엄마. 받을 돈을 받고도 민망해 하는 재일의 할머니. 할머니는 현우에게 돈을 건네주려고 한다. 엄마의 배낭을 들고 엄마를 쫓아 도망가는 현우.
S# 82. 플랫폼, 기차 안 - 낮 기차가 멈춰있는 승강장. 배낭을 메고 떡 봉지를 달랑달랑 들고 엄마를 따라가는 현우. 손에는 기차표가 들려져 있다. 현우 : (배낭을 메주며.) 들어가. 엄마 : (가만히 서서 현우가 도와주는 배낭을 어깨에 메다가 장난스럽게.) 현우야… 이 다음에… 엄마 죽으면 화장해라…. 현우 : (어이없어 하며.) ……. 엄마 : 아니… 그냥. 현우 : …… 나중에 엄마 보고 싶으면 난 어디로 가 그럼…. (역정이 나려고 한다.) 왜 그런 소릴 하구 그래… 재수 없게…. 엄마 : 아니야 취소할게…. 그럼 됐지? 현우 : 빨리 가…! 은은한 미소를 짓는 엄마. 기차에 탄다. 자리에 앉는 엄마, 창 밖에 선 현우를 본다.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치며 씁쓸해 하는 현우. 떡봉지만 달랑달랑 든 채 엄마를 쳐다보지 않는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현우의 모습 멀어지고, 자세를 고쳐 앉은 엄마의 눈가는 촉촉하게 젖어있다.
S# 83. 관악실 - 낮 용석이 주변에 아이들이 모여 있다. “와… 멋있다.” “한번 불어 봐.” “니네 아빠 짱이다.” 반짝반짝 빛나는 새 색소폰을 들고 있는 용석. 관악실로 들어오는 현우. 손에 들려있는 재일이 할머니의 떡. 현우 : 옛다. 떡 먹어라! 아이들 : 와. 아이들하고 떡을 먹는데, 입에서 무엇인가를 쭉 잡아 빼는 현우. 할머니의 하얀 머리카락이 나온다. 애들 눈치를 보는데… 잘 먹는 아이들. 몰래 빼내고 먹는 현우. 현우 : 당번 누구냐? 용석이의 새 색소폰을 부럽게 만져보던 재일이. 깜짝 놀라 현우를 쳐다본다. 아이들 : 재일이요. 현우 : 물 좀 떠 와라. 재일아. 재일이 : 네…. 현우 : ……. “야! 저거 봐.” 창가에 있던 심벌즈가 소리치자 그쪽으로 우르르 몰려가는 아이들. 창밖 저 아래에, 당직이 얼음판에 미끄러져 넘어져 있다. 다시 일어나려다 한 번 더 미끄러지고 마는 당직. 용석, 어느새 잽싸게 새로 산 색소폰을 집어 들고는 창가로 다가가 몸을 숨긴 채 연주한다. ‘라솔라솔~ 미레미레~’ (얼레리 꼴레리.) 다시 힘겹게 일어서는 당직. 음악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이며 갸우뚱 하는 듯하다가, 옷에 묻은 흙을 털어내기에 바쁘다.
S# 84. 병원 - 낮 어두운 병실. 수연이 아버지가 누워있는 침대 옆에 앉아 있다. 잠든 아버지를 확인하고… 침대 정리를 하고 방문을 살며시 닫는 수연.
S# 85. 약국 - 밤 약국 밖에서 떡 봉지를 들고 담배를 피우는 현우. 불이 켜 있고 “잠시 문 닫음” 이라고 써 있다. 수연이 와서 문을 열어준다. 오들오들 떠는 현우. 현우 : 맨날 약국 비워두고 어딜 그렇게 가요? 올 때마다 약국에 붙어있는 적이 없어요. 수연 : (웃으며.) 춥죠? 밖에. 현우 : 네. 어휴… 여기 정말 춥네요. 수연 : … 추워요 여기. 전부 다 꽁꽁 얼어붙어버려요. 봄이 올 때까지는. 현우 : 여긴 겨울이 길죠? 수연 : 네. 다른 데 보단 많이 길죠. 그래서 봄도 제일 늦고…. 그래도 오긴 와요. 현우 : (난로 옆에 손을 가져가며.) 난 추운 게 차라리 더 나아요. 수연 : (영수증 정리, 약품 정리 등등 돌아다니다.) ……. 나두 그랬었어요. 봄이 오면 또 뭐 할 건가…. 허망하게 왔다가 가버리니까. 근데 요즘은 안 그래요. 현우 : 왜요? 수연 : … 글쎄요. 그냥 그래요. 그냥 오구 가구 그러는 거 같애요. 잠시 다녀가는 거죠 뭐. 현우씨처럼…. 그러다 또 오구…. 근데, 선생님은 소화제도 안사면서 요즘 여기 자주 오시는 것 같네요. 현우 : …… 언제 끝나요? 수연 : 끝낼까요, 그만? 내 맘대룬데 뭐…. 그건 웬 떡이에요?
S# 86. 자취방 - 밤 좀 바뀐 현우의 방을 둘러보는 수연. 엄마가 사 주고 간 떡을 먹고 있는 두 사람. 수연 : (먹던 떡을 바라보며.) 재일이 할머니는 재일이 엄마 소식 없나 파출소엘 자꾸 찾아가시는데, 재일인 또 그런 게 창피해서 싫은가 봐요. 현우 : ……. 수연 : (부지런히 먹으며.) 음반 저거 한 몇 장이나 돼요? 현우 : 그건 뭐 얼마 안돼요. 수연 : 더 있어요? 현우 : 서울에 많죠. 한 몇 천 장 돼요. 수연 : 잉? 그거 모으는데 얼마 걸렸어요? 현우 : 한 15년 정도? 수연 : 어이그…. 나 같으면 라디오를 하나 사고 말겠다. 현우 : ……. 방바닥에 놓여있는 트럼펫을 보며 언제 불어 줄 거냐는 듯 현우를 쳐다본다. 수연 : 선생님은 음악, 왜 하게 됐어요? 현우 : …. (무슨 대답을 하려다가.) 모르겠어요. 잘 기억 안나요. 수연 : 저 나팔, 저렇게 방바닥에 굴러다니면 안 되는 거 아녜요? 어두운 구석에서 은빛 트럼펫이 반짝 빛난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에로 테입 몇 개들과 함께 굴러다니는 트럼펫. 수연 : 살 흰 애 추억? 선생님이 이런 애나 추억하고 그래도 되요?
S# 87. 언덕 - 밤 언덕길을 내려오는 현우. 길이 미끄러워 언덕 아래 차를 세워두었다. 추워서 몸을 움츠리며 내려오는데 웬 남자가 하나 길을 막아선다. 현우 : 누구…. (보면 주호.) … 아 안녕하세요! 주호 : (느닷없이.) 수연이 만났어요? 현우 : … 네. 근데… 왜…. 주호 : 수연이하고 무슨 사이예요? 현우 : 예? 주호 : 수연이하고 무슨 사이냐구? 현우 : 그걸 내가 왜 말해야 되죠? 주호 : 수연이 좋아해요? 에? 현우 : ……. (그냥 얼굴을 보고 있다.) 주호 : (흥분하기 시작.) 같이 잤어? 응? 현우 : … 이러지 마세요. (참 나, 하고 비웃듯 길을 비켜 가는데.) 주호 : … 이 새끼가!
S# 88. 파출소 - 밤 얼굴에 상처투성이의 현우와 주호, 한쪽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다. 웬 취객 하나가 들어온다. 취객 : 나 자수하러 왔어요! 순경 : (본다.) 취객 : 자수해서 광명 찾으라며? 나도 광명 찾을라고! 순경 : ……. 취객 : 자수할 게…. 십자수 할 게…. 광명을 찾아줘. 자수하라며? 십자수 하겠다니까! 니미~ 한마디 대꾸도 없이 취객을 끌고 밖으로 나가는 순경. 순경 : (취객을 내 쫓고 현우와 주호 앞으로 와서.) 학교 선생님이 싸움질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현우 : 싸우긴 뭘 싸워요. 두드려 맞았다니까! 순경 : 주호, 너도 제발 말썽 좀 그만 피우고!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못하는 주호. 주호 : (순경에게.) 수연이한테는 말하시면 안돼요. 순경 : 새끼…. 주호 : (애원하는 눈빛.) 진짜 안돼요. 그럼 저 진짜 끝장이에요. 순경 : 그럼 니가 먼저 사과드려. 빨리. 파일북으로 주호의 머리를 탁 치는 모습이 꼭 형 아우 같다. 마지못해 현우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하는 주호. 주호 : ……. 미안합니다. 역시 마지못해 주호의 손을 잡는 현우. 주호 : 저기요…. 앞으로는 수연이 좀 그냥 좀 놔두십쇼. 부탁입니다. 수연이 걔, 그런 애 아니에요… 착한 애예요. 제발 부탁합니다. 현우 : ……. 주호 : 저는… 수연이 없으면… 진짜 아무 것도 없는 놈이거든요. 걔… 그런 애 아니에요…. 괜히 그러지 마세요. 현우 : ……. 순경 : 가 봐. 너 내가 지켜 볼 거야. 순경에게 꾸벅 인사하고 파출소를 나가는 주호. 순경 : 그래도 저 자식이 수연씨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지 몰라. 술두 안먹구. 수연씨 아버지가 병원에 있는지 오래 됐는데, 맨날 가서 출근부 도장 찍는다고 병원에서 소문 다 났어요, 저놈 저거…. 현우 :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순경 : 여긴 대부분 다 진폐증 환자들이에요. 딸내미 하나 있는 게 수연씬데.. 그 여자두 아버지 땜에 여기 붙박혀가지구…. 현우 : …….
S# 89. 거리 - 낮 장사를 끝내고 짐 정리해서 돌아가는 재일이 할머니. 길 건너에 용석이가 옷을 깨끗하게 입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뒤에는 빨간 색 장미 한 다발을 숨기고 있는 용석이. 아이들이 지나가며 뒤에 뭐 있나 보자고 장난을 걸고, 안 보여주려고 숨기는 용석. 조금 부끄러운 모양이다. 아이들 저희들끼리 웃으며 가고, 멀리서 수정이가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다. 용석이가 할머니를 보고 길 건너에서 인사를 꾸벅 한다. 참 좋은 때다 싶은 눈길로, 웃으며 인사를 받아주는 할머니. 폴짝 폴짝 뛰어오는 수정이. 할머니는 눈이 부신지 손가리개를 하고 지는 해를 보고 계시다. 그 눈부심이 그리 싫지 않은 얼굴.
S# 90. 자취집 부엌 - 해질녘 한창 개그 콘서트가 진행중인 TV. 얼굴이 조금 상한 현우. 그 옆에서 재일이가 밥풀을 튀겨가며 TV를 보고 있다. 깔깔대는 재일이. 재일 : 선생님 더 있어요? … 좀 더 주세요. (그릇을 앞으로 쭉 내미는 재일이.) 현우 : 그래…. 나가서 곰국을 더 퍼 담으면서도 TV를 보고 있는 현우. 현우의 휴대폰이 울린다. 재일 : 선생님, 전화 왔어요. 현우 : 어… 그래. 밥을 더 퍼서 재일이를 주고, 손에 묻은 밥풀을 입으로 떼어 내며 전화를 받는 현우. 소금도 가져다주고, 파도 가져다주고… 재일이는 계속 재밌게 TV를 보다가 웃고 밥 먹고 그러고 있다. 현우, 전화기를 들고 시끄러워서 밖으로 나간다. 몇 발짝 걸어가다가 걸음을 멈추는 현우. 구름에 가려져 있던 해가 나온다. 한동안 가만히 서 있다가 재일이 쪽을 돌아보는 현우. S# 91. 거리 - 해질녘 스키드 마크가 길게 나 있는 길. 하얀 길 위에 뿌려진 할머니의 색색깔 떡들. 꽃을 뿌려놓은 듯이 수놓아진 길.
S# 92. 학교 - 해질녘 해 지는 학교 운동장. 아무도 없는 관악실. 눈 녹는 기차 건널목. 성당의 언덕. 마을의 일상 풍경들…
S# 92. 관악실 - 낮 현우가 애들을 앞에 두고 얘기를 하는 중이다. 비어있는 재일이 자리. 현우 : 에릭 클랩튼 있잖아. 아이들 : ……. 현우 : 사람들이 잘 모르는 건데 이건…. 에릭 클랩튼이 아들을 잃고 난 다음에 한참 방황할 때 말야. 자꾸 아들 생각이 나서 그 동네에서 못 살겠어서 이사를 갔는데, 그 이사 간 집 옆 건물에 기타 학원이 있더래. 그래서 거길 지나다 들러서 등록을 했거든. 근데 거기는 중국인 할머니가 기타를 가르쳤는데, 그 할머니한테 에릭 클랩튼이 기타 못 친다고 엄청 구박을 받았대. 그 담부터 다시 기타를 손에 잡은 거야…. 아이들 : ……. 현우 : 진짜야. 그래서 “티어즈 인 헤븐”이 나온 거 아니냐. 아이들 : ……. 현우 : 그러니까 우리두 잘해보자. 알았지? 심벌즈 : 에릭 클랩튼이 누구예요? 현우 : … 그런 사람 있어. 아이들 : ……. (우울하다.) 현우 : …. 오늘은 그만할까?
S# 93. 재일이 집 - 낮 재일이 집 문을 두드리는 현우. 현우 : 재일이 있니? 재일이가 문을 열어 준다. 재일이 얼굴이 의외로 맑다. 방에서 마주 앉아 라면을 먹는 현우와 재일이. 현우 : 엄마 보고 싶지 않어? 재일 : 할머니가 보고 싶지 왜 엄마가 보고 싶어요? 현우 : ……. 재일 : 할머니가 나 바다 데려간다고 했었어요. 현우 : 바다 안 가봤어? 재일 : 가봤어요…. 근데 할머니가 나랑 같이 가고 싶어 하셨어요. 현우 : … 그래? 우리 언제 한번 같이 가자… 그럼. 재일 : 할머니가 안 계시잖아요. 말 없는 두 사람. 현우 라면을 내려놓는다. 현우 : …… 후…. 재일 : … 왜 그러세요? 현우 : 그냥. 재일 : 그냥이 어딨어요. 다 이유가 있지. 현우 : 그냥… 사는 게 힘들어서…. 재일 : …………. 현우 : ………? 재일 : ……. 왜 그렇게 슬픈 얘기를 하구 그래요…. 울음을 참던 재일이의 옷소매가 눈가로 올라간다. 재일이가 운다. 현우 : 미안해, 재일아……. 미안해. 재일 : 나두 힘들어 죽겠어요. 아, 아직… 트럼펫도…. 못 불어드렸단 말이에요…. 자신의 말실수 때문에 우는 재일이를 안아 주지도 못하고 쩔쩔매는 현우. 라면을 앞에 두고 혼자 우는 재일이. 현우 : 힘들어두 참아야지 어떡해 그럼. 재일 : ……. (울음을 억지로 참으며.) 알았어요.
S# 94. 술집 - 밤 (눈) 혼자 술집에서 소주 한잔을 앞에 놓고 있다. 전화를 하는 현우. 현우 : 나야…. 잤어? 엄마 : 잠이 안와서 테레비 보는데 왜? 무슨 일 있니? 현우 : 그냥…. 엄마는 어디 아픈 데 없어? 엄마 : 아픈 데가 왜 없니…. 이 나이 되면 여기저기 성한 데가 없지. 현우 : 뭐… 약 같은 것 좀 먹고 그러지. 엄마 : 약은 무슨…. 현우 : 엄마 영양제 하나 사 주면 먹을래? 엄마 : 아이구, 먹지 그럼 안 먹어? 현우 : … 엄마! 엄마 : 응? 현우 : 엄마 나 사랑해? 엄마 : 미친놈…. 현우 : ……. 엄마 : 현우야…. 현우 : …. 엄마 : 현우야, 무슨 일 있니? 현우 : 아니……. (눈물이 핑 돈다.) 엄마… 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어. 엄마 : 뭘? 현우 : 그냥 뭐든지. 엄마 : 어이구…. 너는 지금이 처음이야. 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밖을 나와 보면 눈이 내리고, 그대로 서서 가만히, 한참동안 눈을 맞고 있는 현우.
S# 95. 재일이 집 - 밤 먹을 것을 사 가지고 재일이 집을 두드리는 현우. 대답이 없다. 현우가 문을 열면 방안에 아무도 없고. 창 밖에 내리는 눈 그림자만 비추는 재일이네 빈 집. 황망하게 서 있는 현우.
S# 96. 파라다이스 캬바레 안 - 밤 술에 취해 땀까지 흘려가며 열정적으로 연주하고 있는 현우. 색소폰이 아닌 트럼펫이다. 모든 걸 토해내기라도 하는 듯한 몸짓. 평소와 다른 현우의 모습에 의아해 하는 캬바레 사장.
S# 97. 관악실 - 낮 아이들도 현우도 다들 힘이 없어 보인다. 재일이 자리가 비어있다. 현우 : (악장에게.) 재일이 연락 없니? 심벌즈 : 저… 선생님… 재일이가요…. 선생님 트럼펫을 훔쳐갔는데요…. 용석 : 너 이 새끼, 훔쳐가긴 누가 훔쳐가. -- 사이 -- 아이들이 가고 없는 관악부. 혼자 남아서 재일이의 악기를 고치고 있는 현우.
S# 98. 관악실 앞 계단 - 낮 소리가 조금 새는 듯한 트럼펫 소리가 들린다. 현우가 가끔씩 흥얼거리던 연희의 음악. 누군가 다가가 문을 살며시 열어보면… 이내 멈추는 연주. 수연이 연습실로 들어간다. 돌아보는 현우. 창가에 선 현우. 문가에 선 수연. 현우 : (약간 놀란.) … 오셨어요? 수연 : 제가 들어 드릴게요. 마저 해 주세요. 현우 : … (잠시 고민… 웃으며.) 나중에 들려드릴게요. 트럼펫을 내려놓는다. 수연 : 왠지 여기 계실 것 같아서요…. 현우 : (웃는다.) ……. 수연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현우 : ……. 수연 : 별 일 없을 거예요. 속이 깊은 애니까…. 현우 : 그럼요…. 수연 : (트럼펫을 바라보며.) 그건 재일이 오면 들려주세요. 현우 : (웃으며.) … 네….
S# 99. 거리 - 낮 수연이 학교 정문을 빠져 나와 걸어오는데, 그 옆에 소형 승용차 한 대가 선다. 창문이 내려지고, “저기요” 수연 돌아보면 연희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웃고 있다. 연희 옆에는 경수가 타고 있다. 연희 : 여기 도계중학교가 어디예요? 수연 : 바로 저거요. 연희 : 네 고마워요. 수연을 지나온 연희. 학교 앞에 차를 세운다. 경수 : (내리면서.) 학교에 아무도 없을 텐데…. 관악부를 어디서 찾냐…. 연희 : 뒤져보다가 음악소리 나는 데만 따라가면 되잖아. 경수 : … 근데 너… 진짜 보러 안 갈 거야? 연희 : … 응. 저기, 경수오빠…. 오빠한테 나랑 같이 온 거 말하지 말어. 경수 : 그래. (사이.) 그냥 서울 갈 거야 그럼? 운전을 좀 쉬어야지. 연희 : 바람 좀 쐬고 가지 뭐. 꼭 약속이다… 알았지? 경수 : 그래… 조심해. 연희 : 응. 간다. 경수 : 그래두, 뭐… 전하고 싶은 말 없어? 연희 : 그런 게 있으면 내가 갔지. 갈게 오빠. 경수 : 응 그래. 연희 차 출발하고, 에휴~ 하는 경수. 수연을 지나쳐가던 연희. 다시 차를 세운다. 연희 : (웃으며.) 저기요. 죄송해요, 자꾸. 수연 : 네… 아니에요. 연희 : 여기서 제일 가깝구 가볼만한 바닷가가 어디예요?
S# 100. 횟집 - 낮 수연과 같이 왔던 횟집에 현우와 경수가 앉아 있다. 멍하니 창 밖의 바다만 보고 있는 경수. 현우 : 바다 처음 보냐? 원샷으로 소주를 한잔 들이키는 경수. 현우 : 천천히 마셔라… 야, 너 거기 무대엔 계속 서냐? 경수 : 무대? 어…. (잠시 현우를 쳐다보고는.) 근데 웬일이냐. 밤무대라고 안 그러고…. 현우 : 아니 뭐… 내가 말만 그렇게 한거지 임마…. 사실 연주야 다 똑같지 뭐… 잘하라고. 잘해…. 경수 : 철들었네, 자식…. 현우 : 우리 음악 안했으면 뭐하고 있을까? 너 그런 생각해본 적 있어? 지금보다 행복했을까? 경수 : 갑자기 왜이래…? 행복은 무슨… 연애를 해야 행복하지…. (한잔 또 원샷.) … 나…. 만나는 여자가 있었는데…. 어제 헤어졌다. 한 2년 됐나? 현우 : 2년? 근데 내가 그동안 몰랐단 말야? 경수 : 그냥 뭐… 내가 얘기를 안 했으니까…. 현우 : 왜 얘기 안했어? 경수 : ……. 현우 : 응? 경수 : 결혼한 여자거든. 현우 : 뭐? 현우 : 어… 이 새끼 봐라… 이거…. 현우 : … 그래서 그동안 몰래 만났던 거야? 나한테도 말 안하고? 경수 : 몰래… 라기보다는… 그냥…. 유부남이랑 유부녀랑 바람피우는 거…. 단지 그렇게만 보이는 게… 싫어서…. 현우 : 그게 유부녀랑 유부남이랑 바람피우는 거지 뭐야 새꺄. 이게 아주 순…. 경수 : 내가… 되게 많이 좋아했거든. (연거푸 술만 들이키는 경수.) 현우 : 야, 그래두 그렇지. 경자씨한테 안 들켰어? 한번두? 경수 : ……. 현우 : 너 그럼 안 돼지. 밖에 나가서 딴 여자랑, 것두 유부녀랑 그 짓을 한단 말야? 나쁜 놈이네 이거. 경수 : 야 새꺄! 넌 그럼 식구끼리 그거를 어떻게 하니? 현우 : 뭐? 경수 : 아 씨발. 이거 세 병만 먹자고 정해 놓고 먹으니까 더 취하네. 너 있잖아, 니 인생 꼬였다고 내 인생 꼬이게 하지 마라. 무슨 말인지 알지? 난 우리 경자랑 잘 살 자신 있어… 알아? 너만 입 다물고 있음 돼. 현우 : 식구끼리는 그거 하는 거 아니래매!
S# 101. 바닷가 - 낮 해변가 끝 쪽 한구석에 재일이가 혼자 앉아 트럼펫을 손에 꼭 쥐고 있다. 바다를 보며 울고 있는 아이. 그 뒤 멀리에서 핫도그 하나 입에 물고 다가오는 연희. 트럼펫을 쥐고 있는 아이를 보고… 지나치다가… 다시 가서 옆으로 다가간다. 주위를 둘러봐도 일행이 없어 보이는 아이. 중학생이지만 작아서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재일이. 연희 : 여기 앉아두 되니? 재일 : 네…. 연희 : …… 여기서 뭐해? 혼자? 재일 : …… 그냥요. 연희 : 왜, 누가 때렸어? (아이가 울었다는 걸 금방 아는 연희.) 재일 : 아녜요. 그런 거 없어요. 연희 : (아이를 살펴보는데 뭔가 불안하다.) … 너 나팔 잘 부니? 재일 : …… 이건 나팔이 아니라 트럼펫이에요. 연희 : …… 응 그래. 트럼펫…. 너 그거 누나한테 한번 불어 줄 수 있어? 재일 : ……. 연희 : 싫어? 재일 : 저… 그럼, 저 차비 좀 주실래요? 연희 : (황당한 표정으로.) …… 차비? 재일 : ……. 연희 : 얼마나 있어야 되는데? 재일 : 천삼백원이요. 연희 : 그럼 나팔 불어줄 거야? 재일 : …… 네. 연희 : 그럼 먼저 불어주면 줄께. 차비 줬는데 그냥 가면 어떡해? 재일 : ……. 그럼 불게요. 뭐 불까요? 연희 : 너 불고 싶은 거 불어줘. 재일 : ……. 재일이가 트럼펫을 분다. 연희 : ……! 재일이의 트럼펫소리가 바닷가 한 구석에서 울려 퍼지는데…. 현우가 흥얼거리던 음악보다 훨씬 빠르고 경쾌해진 연희의 곡이다. 할머니에게 부는 건지 연희에게 부는 건지 모를 재일이의 트럼펫 소리가 바닷가에 울려 퍼진다. 지나가다가 발걸음을 멈추는 몇몇 연인들. 웬 여자와 나팔 부는 소년의 이상한 모습에 호기심을 갖고 보고 있다. 연희 : (재일이를 보는.) …….
S# 102. 바닷가 - 밤 폭죽 소리 너머 낮게 연희의 음악이 들려온다. 바닷가에 앉은 두 사람. 현우 : ? 폭죽 날리는 사람들. 바닷가에 버려진 온갖 폭죽 쓰레기들… 어디서 들리는 소린지 주위를 둘러보는 현우. 점점 더 많은 폭죽을 터뜨리는 사람들. 폭죽소리에 묻혀 잘 들리지 않는다. 경수 : (술에 잔뜩 취해서.) 저것들 아가리에 폭죽을 18연발씩 날려야 한다니까. 그럼 저 짓 다신 안할 걸? 현우 : ……. 경수 : 너 연희 있잖아…. 버린 거냐, 놓친 거냐? 현우 : …… 너 이 소리 들리니? 경수 : 무슨 소리? … 폭죽 소리? 현우 : 아니… 나팔소리. 낮게 들리던 트럼펫 소리 멈춘다. 경수 : 헛소리 하지 말구 내 말 들어. 뭐든지 확률은 50프로야…. 되든지 안 되든지…. 생각 쉽게 해, 쉽게. 현우 : ……. 사라진 소리를 찾아보는 현우.
S# 103. 해변가 식당 - 밤 연희와 재일이가 앉아 떡볶이를 먹고 있다. 식당 밖으로 현우와 경수가 지나간다. 연희 : 아줌마 여기 일인분만 더 주세요. 천천히 먹어. 난 오뎅두 먹구 싶은데. 재일 : 네, 저두요. 연희 : 오뎅두 2인분 주세요. 재일 : (연희보고.) 저기요, 아줌마…. 연희 : 어머? 얘 봐. 누가 아줌마야? 누나야, 누나! 재일 : 네, 누나…. 나 궁금한 거 하나 있는데요. 연희 : 응. 뭔데. 재일 : 그거, 쫄바지 입고도 겨울에 여자들은 안 추워요? 연희 : 이거? 이거 쫄바지 아니야, 꽃바지야 꽃바지!
S# 104. 도로 - 밤 아무 것도 없는 깜깜한 국도. 가로등도 없다. 밤길을 달려오는 애꾸눈 낡은 차. 경수 : 야, 너 괜찮아? 현우 : 나 별루 안 먹었어. 경수 : 뭐 이렇게 헤드라이트가 변변찮냐… 뭐 보여? 하나 남은 헤드라이트가 또 나간다. 현우 : 아~ 새끼…. 그니까 너 입 좀 조심해. 경수 : 야, 세워! (꺽꺽거리며 입을 틀어막고 있는 경수.) 현우 : 거 봐라 임마. 아… 정말…. (속도를 줄이는 현우.) 국도변 풀섶에 나와서 오줌 누는 현우. 까만 실루엣. 경수는 몸을 구부린 채 토하고 있다. 힘이 드는지 꺽꺽거리는 경수. 등을 두드려 주는 현우. 현우 : 뭐 먹구 살 거 있다구 그렇게 처먹냐 처먹길…. 경수 : 아 씨발. 암것두 안보이니 어떡하냐. 현우 : 하던 거나 마저 해. 뭐 어떻게 되겠지? 경수 : 웩~ 멀리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차 한 대가 달려온다. 현우 : 어… 빨리 해, 새꺄! 저거 따라가야 돼. 빨리! 경수 : 아~ 정말…. (서둘러 토해내고 일어나는 경수.) 차로 들어가는 현우. 현우네 차 옆을 지나가는 차 한 대. 경수 서둘러 뛰어와 타면 현우, 그 차를 따라간다. 저만치 앞서서 달리는 소형차. 그 차 뒤의 빨간 불빛을 보고 달려가는 현우.
S# 105. 차 안 - 밤 재일이는 안전벨트를 얌전히 매고 운전하는 연희를 가끔씩 쳐다본다. 연희 : 너 혹시 도계 중학교 다니니? 너 거기 관악부야? 재일 : 네. 아세요? 연희 : 아니. 그냥 조금…. 너 아까 그 곡 어디서 배웠어? 재일 : 우리 선생님한테서요. 좋죠? 제가 잘 못 불어서 그렇지. 연희 : …… 근데 그게,…. 원래 그런 곡이니? 나두 그거 아는데……. 재일 : 원래 조금 느린 건데요…. 우리 선생님이 고쳐주셨어요. 원래 건 성인용이래요. 연희 : (피식.) 그래? 재일 : 근데 왜 누나는 아까 울었어요? 연희 : 누가 울어? 재일 : 아까 울었잖아요. 연희 : … 어머 얘 봐…. 누가 울었다 그래…. 생사람 잡고 있어 쪼그만 게…. 재일 : ……. 카오디오에 반쯤 튀어나온 테입을 또 툭 집어넣는 재일이. 정훈희의 <꽃길>이 흘러나온다. 재일 : 이거 무슨 노래예요? 연희 : 옛날에 친구가 나 들으라고 녹음해 준 거야…. 재일 : ……. 좋다. 연희 : (웃는다.) 좋지?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면은 두고두고 그리운 사람 잊지 못해서 찾아오는 길 그리워서 찾아오는 길 꽃잎에 입 맞추며 사랑을 주고받았지 지금은 어데 갔나 그 시절 그리워지네” 연희 차 뒤에 헤드라이트가 꺼진 차 한 대, 꾸준히 따라오고 있다.
S# 106. 도계 입구 - 밤 연희의 차가 멀리 선다. 뒤 따라 오던 현우 차는 도계로 진입, 읍내로 방향으로 가고, 재일이가 내린다.
재일 : 고맙습니다. 연희 : 그래. 재일 : 조심해 가세요. 연희 : ……. “잘 있어.” 손 흔들어 주고 떠나는 연희. 연희 차 멀어지다가 멈추어 서는 연희 차. 다시 뒤로 붕~ 다가오더니 명함을 하나 건넨다. 연희 : 너 있잖아. 서울 오면 누나한테 전화해 알았지? 재일 : 네…. 차가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는 재일이.
S# 107. 기차역 - 밤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현우와 경수. 표를 끊는 경수. 현우 : 너 올 때 뭐 타구 왔어? 경수 : 어? … 기차 타구 왔지, 말 타구 왔겠냐, 그럼? 왜? 현우 : 근데 올라갈 기차표두 안 끊구 왔어? 경수 : …… 얌마, 친구 만나는데 어떻게 시간을 정해놓구 만나냐? 현우 : 그러니까 그냥 자구 가! 경수 : 자식아, 내가 이쁜 내 마누라 놔두고 왜 너하고 자냐? 현우 : (그냥 웃으며.) 그래… 잘가라. 경자씨한테 잘 해주구…. 개찰구로 가던 경수. 경수 : 저 있잖아. 그게…. 현우 : 왜 뭐 잊은 거 있어? 경수 : 저기, 연희 있잖아. 현우 : ……. 경수 : 사실은 말하지 말라 그랬는데, 현우 : ……. 경수 : 그 결혼 안하기로 했대. 피아노 학원 다시 열었다고 하더라…. 현우 : ……. (편한 웃음으로.) 넌 자식이 왜 그렇게 입이 가볍니? 경수 : ……. (웃으며.) 미안하다. 갈게 그럼. 플랫폼으로 들어가던 경수, 현우 쪽으로 뒤돌아보더니, 경수 : 야! 그래도 음악 좋~잖아? 어? 하던 거 그냥 하자 씨… 이제부터 잘하면 되는 거 아냐? 웃는 현우.
S# 108. 관악실 - 낮 현우가 관악실로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보는 재일이 자리. 재일이가 웃고 있다. 담담하게 자기 자리로 가는 현우. 현우 자리엔 재일이가 가져갔던 트럼펫이 놓여있다. 아이들도 현우의 별 반응 없음이 이상한지… 심벌즈 : 선생님. 재일이 왔어요. 현우 : 어 그래…. 재일이 어디, 갔다 왔니? 재일 : 네. 기쁜 마음으로 연습에 몰입하는 아이들. 자꾸 트럼펫 쪽에서 재일이가 실수를 한다. 현우 : 그만 그만…. 재일이 쪽으로 걸어가는 현우, 재일이에게 아프게 꿀밤을 먹인다. 왜 자꾸 틀리는 거야? 그렇게 하면 안 된댔잖아. 재일이도 눈물이 날 정도로 아프게 맞아 놓고서도 별로 싫은 기색이 없다. 현우 : 자. 선생님이 하는 거 잘 들어봐. 재일이의 트럼펫을 뺏어드는 현우. 연주를 시작한다. 기본기를 가르쳐 주려는 현우. 별 기교 없이 편안하게 연주하는데, 제대로다. 무언가에 몰입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현우의 연주에 아이들 모두 푹 빠져 든다. 용석이는 몽롱한 표정으로 아예 턱을 괴고 듣고… 그럴 즈음 딱 끝나버리는 현우의 연주. 아이들 난리가 났다.“에잇~ 뭐예요.” “말도 안돼…” “더 해 주세요.” 현우 : 자 자, 그만! (딱 딱 딱.) 뭐 하는 거야? 이놈들. 재일이 잘 들었지? 뭐가 다른지 알겠어? 재일 : 네…. 진심이요. 현우 : 아쭈…. 현우의 메시지 벨이 울린다. 메시지를 받고 창 밖을 보는 현우. 점등시간... 재일이 왔죠? 수연 - “안돼요…. 더 해주세요.” “이럴 순 없어요, 정말. 엉 엉 엉~” “우리 집에 갈래요.” “선생님 짱이에요.” 온갖 소릴 다 하면서 난리를 치는 아이들. 애들 보고 웃는 현우, 창밖을 잠깐 보더니, 다시 트럼펫을 입으로 가져간다. 창 밖을 향해 이어지는 현우의 트럼펫.
S# 109. 언덕 - 해질녘 해질녘의 하늘을 배경으로 혼자 난간에 앉아 있는 수연. 동네에 가로등이 차례로 들어온다. 수연, 저절로 편안한 미소가 떠오른다. 어디선가 트럼펫 선율이 들리는 듯…
S# 110. 관악부 - 밤 현우 : 야, 너네들…. 술 안마시니? (용석이를 보며.) 용석 : 왜 저를 보세요? 심벌즈 : 학교에선 안 마시는데요. -- 경과 -- 아이들과 난로 주변에 앉아 술을 마시는 현우. 현우 : 이거 사람들이 알면 퇴학이지… 나…. 아이들 : 네. 현우 : (아이들 둘러보면 안대를 한 아이가 한명도 없다.) 눈병은 돌다 돌다 이제 다 끝난 모양이네? 아이들 : (웃는다.) 현우 : 긴장돼? 아이들 : ……. 현우 : 걱정하지 마. 우승하지 뭐, 까짓 거. 아이들 : ……. 아이들은 사이다를 마시고 현우는 소주를 들고… 건배…
S# 111. 약국 앞 - 밤 멀리서 약국을 바라보며 서성거리는 현우. 수연이 정리를 하고는 불을 끄고 나온다. 약국 셔터를 내리려는 수연에게 현우가 다가간다. 현우 : 좀 도와드릴까요? 수연 : (미소 지으며.) 잘 하지도 못하면서….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보이는 현우.
S# 112. 거리 - 밤 밤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 현우 : 재일인 뭐해요? 수연 : 자요. 내일 대회라구 일찍 잔대요. 실수할까봐 많이 긴장하는 것 같던데…. 현우 : 잘 하는데요, 뭘…. 수연씨 잘 따르죠? 수연 : 그럼요, 우리가 원래 얼마나 사랑하는 사인데요. 선생님 오시기 전부터. 현우 : ……. 수연 : ……. 편한 얼굴로 걷고 있는 두 사람을 감싸고 있는 도계의 밤. 언덕에 올라 잠시 선 두 사람. 수연 : … 추운데 들어가세요. 현우 : ……. 수연이 돌아서 가는 모습을 보는 현우.
S# 113. 버스 안 - 낮 조금은 긴장된 아이들과 현우. 창 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는 아이들. 현우가 입을 뗀다. 현우 : 너네 그 옷 괜찮니? 관악복두 없이. 심벌즈 : 뭐 어때요! 멋있잖아요. 입으로 박자를 맞추며 신나게 연주하는 아이들. 빰빠 빰빰… 빰 빰 빰… 딱 딱… 등등… 입으로 낼 수 있는 소리를 동원해 박자를 맞추어 보는 관악부. 정말 즐겁게 난리를 치며 박자를 맞추어보는 아이들. 버스가 대회를 향해 달린다.
S# 114. 국립극장 대회장 주변 - 낮 전국 관악 경연대회 플래카드가 걸린 국립극장. 초등학생부터 일반까지 전부 참여하는 가장 큰 대회.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관악부들이 단복을 쫙 빼입고 국립극장 계단 곳곳을 점령하고 있다. 현우는 아이들이 주눅이 들까봐 걱정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데,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 보이는 아이들. 몇 명은 따로 떨어져 나와서 웃고 장난치고, 심벌즈가 또 그 엉덩이춤을 추고 있다. 관악부 아이들, 서로 무스를 뺏어 바르느라 난리다. 다른 학교 관악부 애들이 교복 촌스럽다고 흉보며 지나가는데, 휘익 째려보는 용석. 찍 소리도 못하고 조용히 지나가는 흉본 아이들. 객석에 서서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현우. 감개가 무량하다.
S# 115. 무대 뒤 - 낮 무대에 올라 연주를 하고 있는, 서울 남녀공학 고등학교 관악대. 40여명이 넘는 규모에, 멋진 단복. 연주도 훌륭하다. 그에 비해 커튼 뒤에서 대기 하고 있는 도계의 아이들의 모습은… 20명이 미처 안 되는 규모, 때가 꼬질꼬질한 교복, 구멍이 숭숭 뚫리고 땜질로 메운, 언제 샀는지 모를 악기들. 작고 어린 아이들. 현우 : 떨려? 겁먹을 거 없어. 괜찮아. 우리가 두 번째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지? 재밌게 한번 놀고 간다고 생각해 버려. 아이들로부터 돌아 선 현우. 정작 본인은 긴장된 얼굴로 긴 숨을 내쉬는데, 아이들한테 떠밀린 악장이 다가온다. 악장 : 저… 선생님. 현우 : 어? 왜? 악장 : 저… 이거…(애들을 한번 돌아보며.) 애들하고 같이 준비했거든요. 허리 뒤춤에서 뭔가를 내미는 악장. 지휘봉이다. 왠지 조잡해 보이는 지휘봉, 손잡이엔 깨알 같은 글씨가 박혀있다. ‘도계중 만세!’, ‘선생님 감사합니다.’ 용석 : 선생님, 지휘는 폼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너무 폼 잡지 마세요. 현우와 아이들 웃는다. 현우를 선두로 무대로 들어서는 아이들. 박수가 터져 나온다. 탄광촌의 중학교 관악부로 그 동안의 우승경력이 소개되자 더 큰 박수가 터져 나오고… 긴장된 얼굴로 걸어 나오던 현우는 맨 앞줄에 앉아 박수를 치는 엄마를 보고 환하게 웃어 버린다. 팍~ 환한 빛이 현우 얼굴에. 작은 자동카메라를 들고 있는 엄마도 환하게 웃고. 아이들도 약간 들뜬 표정으로 무대에서 자기 자리를 찾아 앉는다. 잠시 고요한 순간이 지나고. 심호흡을 하더니 지휘봉을 움직이는 현우. 그동안 연습했던 힘찬 행진곡이 터져 나온다.
S# 116. 그림들 - 낮 아이들의 연주 흐르면서, 그 동안 현우가 지나왔던 공간들이 보여진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공간들. 갱도. 도계를 가로 지르는 기찻길. 눈이 녹지 않은 채 아직 비어있는 학교 운동장. 빈 관악실. 언덕. 그리고 옛 동네…….
S# 117. 버스 안 - 낮 아이들의 연주 음악 계속 흐르면서, 돌아가는 버스 안의 풍경. 잠든 아이들도 보이고… 담담한 아이들의 표정. 현우도 담담하다. 한쪽 눈이 가려운지, 손으로 눈을 비비고 깜빡여보는 현우. 누군가 “어~ 바다다!” “놀다가요. 선생님…”
S# 118. 바닷가 - 낮 바닷가에 버스가 서고 뛰어 내리는 아이들. 모래사장에 자빠지고 서로 밀고 하는 즐거운 모습들. 해가 넘어 가고 있다. 현우와 재일이가 앉아 아이들을 보고 있고. 현우 : 참, 재일아, 선생님 트럼펫 있잖아. 그거 줄 테니까 너 써라. 재일 : 정말요? 현우 : 그래…. 재일 : (나름대로 심사숙고하는 듯한.) 아니요…. 그냥 저는 선생님이 고쳐준 게 더 좋은데요. 현우 : 그래? 저기 그리구… 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재일 : 네? 현우 : 서울대…. 선생님… 서울대 안 나왔거든? 재일 : (개의치 않는 듯한.) 저… 지난번에 바닷가에서… 어떤 아줌마를 만났는데요. 현우 : ……. 재일 : 아… 아줌마 아니라 그랬구나. 되게 예뻤어요. 현우 : 수연이 누나보다 더 ? 재일 : 그만큼 예뻤어요. 참, 명함 받았는데 선생님 드릴까요? 현우 : 됐어, 임마. 재일 : 근데… 울고 있더라구요. 현우 : 왜? 재일 : 모르겠어요. 선생님한테 배운 곡 연주했더니 울더라구요. 현우 : ……. 재일 : 좋은 아줌마던데… 왜 우는지 모르겠어요. 현우 : ……. 재일 : 사람들은 다 슬픈 일들이 있나 봐요. 현우 : ……. 바다를 보며 말없이 앉은 두 사람. “우리 사진 한 장 찍을까?” “네~!” 바위 위에 사진기를 올려놓고, 같이 모여서. 웃고 있는 아이들… 현우. 찰칵.
S# 119. 약국 - 낮 문을 열고 들어오는 현우. 수연 : 어서오세요. 현우 : 안녕하세요. 수연 : 고생하셨어요, 그동안. 현우 : 한 것도 없는데요 뭐…. 대회도 떨어지고…. 수연 : ……. 현우 : 저… 수연씨…. 수연 : 네? 현우 : (입가에 맴돌 뿐 말을 하지 못하다가, 그냥 웃으며.) 아니에요. 수연 : 싱겁기는…. 한참 가실 텐데, 밥은 드셨어요? 현우 : 네? … 아뇨. 수연이 난로 위에 올려져 있던 작은 냄비 뚜껑을 열어보면 냄비 속 누룽지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현우 : 누룽지? 수연 : (어느새 숟가락을 내밀며.) 지금 막 먹으려던 참인데…. 이거나 드시고 가세요. 현우 : 그럴까? 맛있겠네…. (한 숟가락 떠서 후후 불어 입에 넣는다.) 수연 : 근데 눈은 왜 그러세요?
S# 120. 카센터 - 낮 주호가 현우 차의 헤드라이트를 손보고 막 일어서고 있다. 차 옆에 선채로 차창으로 손을 집어넣어 헤드라이트의 불을 껐다 켰다 해보는 현우. 한쪽 눈엔 안대를 차고 있다. 주호 : (현우의 안대가 자기 때문인 줄 알고.) 죄송해요. 현우 : 뭘요…. (안대를 만지작만지작.) 점심은 드셨어요? 주호 : 아뇨. 현우 : 수연씨 맛있는 거 먹고 있던데…. 가서 같이 드세요. 혼자 있던데. 주호 : 예…. 현우 : ……. 주호와 멋쩍은 악수를 하는 현우. 두 사람 마주보고 웃는다.
S# 121. 관악실 - 낮 빈 관악실. 그동안 관악부를 지도한 선생들과 찍은 단체사진들. 근엄한 표정을 짓는 선생님들과 아이들. 그 맨 아래 엉망으로 엉켜 찍은 현우와 아이들의 사진이 붙어있다. 현우가 올 때보다 조금 깨끗해진 관악실의 풍경들. 벽에는 계란판도 잘 정렬되어 붙어있고… 악기들도 낡았지만 윤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따뜻한 볕이 드는 창가, 재일이 자리 위에 놓인 채 은빛으로 반짝이는 현우의 트럼펫.
S# 122. 도로 - 낮 현우, 언덕에 차를 세우고 도계를 바라본다. 도계를 떠나는 현우. 점점 멀어진다.
S# 123. 현우네 새 집 - 낮 집에 아무도 없다. 현우 방 안에 사진이 하나 걸려있다. “사랑하는 현우에게” 라고 유리에 씌어진, 무대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현우의 사진.
S# 124. 현우네 새 집 앞 - 낮 환한 동네를 산책하는 현우. 걷다가 눈부신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는 햇살이 따뜻한지, 입고 나왔던 겨울 겉옷을 벗어 팔에 걸친다. 텃밭에 나가 있는 엄마. 현우 : 거기서 뭐해? 엄마 : 왔니? 눈은 또 왜 그래? 현우 : 몰라… 별거 아니래…. 엄마 : 에이구…. (텃밭을 가리키며.) 현우야, 이거 봐라. 이거, 엄마가 다 심은 거…. 현우 : (역시나 엄마는 못 말린다 하는 웃음.) 현우, 가게에 들어가 담배를 하나 사 가지고 나온다. 담배를 물고 신문을 하나 사 들고 걸어가는 현우 머리 위로 저게 무슨 나무냐고 묻던 그 나무에 복사꽃이라도 환하게 피어있다.
S# 125. 연희 집 앞 - 낮 링겔 꼽혀있던 그 나무 아래 서서 올려다보고 있는 현우. 역시 벚꽃이 활짝 핀 나무. 벤치에 앉아 있던 현우 시야에 시장을 다녀오는 연희가 보이고…. 나무 뒤로 숨는 현우. 잠시 아쉬운 듯 연희가 사라진 현관을 바라본다. 단지를 빠져 나오는 현우. 느릿한 걸음으로 걷다가 문득 가방을 놓고 온 것이 생각난다. 벤치에 놓여있는 가방과 악보집. 다시 벤치에 앉는 현우, 전화를 건다. 연희 : ………. 현우 : 여보세요? 연희 : ………. 현우 : 사람이 전활 받았으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대답을… 연희 : … 왜 걸었어? 현우 : 왜 걸긴…. 뭐 하냐? 연희 : ……. 현우 : 바뻐? 이따 술이나 한잔 할래? … 시간 있어? 연희 : 술은 갑자기 왜…? 현우 : 왜는 뭐가 왜야…. 그냥… 봄이잖아…. 야…. 너 학원 차렸다며? 연희 : ……. 현우 : 트럼펫이나 색소폰 같은 거는 안 가르치니? 괜찮은 강사 하나 있는데…. 꽃잎이 날리는 오래된 아파트 단지. 오월의 눈부신 태양 아래, 봄을 걷고 있는 사람들. 바람에 날리는 악보집… 한 장 한 장 넘어간다. 연희의 음악이 담긴 페이지가 나오고, 그 위로 흔들리는 나뭇가지 그림자. 한잎 두잎, 꽃잎 떨어지고. 그 위로 그 동안 현우가 만들어오던 음악이 경쾌하게 흐르면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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