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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범석, '불모지(不毛地)' 전문 듣기

불모지(不毛地)


차범석

나오는 사람들 최 노인(60) 혼구실업주인 / 어머니(57) / 아들 경구(26) 제대군인 / 아들 경재(18) 고등학교 3학년 / 딸 경애(23) 영화배우를 꿈꾸는 처녀 / 딸 경운(20) 출판사 식자공 / 복덕방 노인(65) / 우체부 / 형사
때: 현대 / 곳: 서울 무대 번화한 상가에 자리 잡은 최 노인의 낡은 기와집 정면에 유리문이 달리고 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이 둘 있고 좌편으로, 기역형으로 굽어서 부엌과 장독대 유리문 저쪽은 가게 우편으로 대문을 끼고 헛간과 방 하나의 딴 채가 서너 평이 못 넘는 좁은 뜰을 에워싸고 웅크리고 앉았다. 해묵은 지붕에는 푸른 이끼며 잡초까지 자라나서 오랜 풍상을 겪어 내려온 이 집의 역사를 말해 주는듯하다. 배경으로 면목이 일신해져 가는 매끈한 고층 건물의 행렬이 엿보이고 좌우편에도 역시 삼사 층이나 되어 보이는 최신식 건물이 들어서서 이 낡은 기와집을 거의 폐가처럼 멸시하고 있다. 좌편 건물은 아직도 건축공사가 진척중에 있는지 통나무로 얽어맨 작업 보조대에 가적대기가 걸려서 건물은 반쯤 가려진 채로다. 이처럼 대척적인 주변의 장애로 말미암아 이 낡은 집 안팎에는 온종일 햇볕이 안 드는 탓인지 한층 어둡고 습하며 음산한 공기가 찬바람처럼 풍겨 나온다. 때는 초여름 어느 일요일 오전 막이 오르면 질주하는 전차며 자동차의 소음이 잇따라 들여온다. 뜰 가에서 경운이가 함석 통에 담긴 빨래를 빨고 있고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는 어머니의 초라한 모습이 보인다. 좌편 담 아래에 마련된 조그만 화단 앞엔 아까부터 최 노인이 쭈그리고 앉아서 화초며 푸성귀들을 손보고 있다. 입에 물린 파이프에서 이따금 뱉어지는 담배 연기가 한가롭다. 잠시 후 경애가 물지게를 지고 좁은 대문을 간신히 빠져나와 경운 앞에다 부려 놓는다.



[경재] 어유 오늘은 웬 사람이 그리도 많아--- 공동 수도엔 난장판인걸! (하며 항아리에다 물을 붓는다.) [경운] (여전히 빨래를 하며) 비가 개니까 집집마다 빨래하느라고 그렇겠지--- [경재] 아버지 우리도 다음엔 제발 물 흔한 집으로 옮깁시다. 물만 길다가 내년 봄엔 낙제하게 생겼는걸요! 하루이틀 아니구--- [최 노인] (돌아보지도 않고) 그래--- [경운] 애도 속없는 소리 잘하긴 경애 언니 닮았나 봐! 누가 이따위 구석에서 살고 싶어 살고 있니? [경재] 살기 싫으면 딴 대로 옮기면 될 걸 왜 이런 게딱지 굴 속에서 산다는 거요? [최 노인] (눈을 크게 부릅뜨며) 무슨 소리냐? 이 집이 어때서? [경재] 아버지나 좋아하시지, 우리 식구중에서 이 집을 좋아하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최 노인] 싫은 놈은 언제건 나가라지! 절간이 미우면 중이 나가는 법이야. [경재] (남은 물통을 비우며) 중도 없는 절을 뭣에 쓰게요? 도깨비나 날걸--- [최 노인] (약간 핏대를 올리며) 도깨비가 나건 노다지가 나건 제집 지니고 산다는 걸 다행으로 알아, 이놈아! [경재] (못마땅한 낮으로) 다행으로 알 건덕지가 있어야죠. [최 노인] (휙 돌아서며) 뭐, 뭐야? [경운] (재빨리 공기를 수습하려 들며) 경재야 한 번만 더 길어와! 물이 끊어지면 어떡혈랴구--- [경재] 또야? 나 시간 약속이 있는데--- [경운] (흘겨보며) 너 그러면 나와 약속한 일 국물도 없다! [경재] (짜증을 내며) 정직이 하고 도서관에서 공부하기로 했는걸--- 9시 40분까지 가야 돼요. [어머니] (설겆이 통을 들고 부엌에서 나오며) 바쁘면 어서 가려무나. 설겆이가 끝나면 내가 길을 테니--- [경재] (펄적 뛰며) 엄마가 제일이야! 우리 엄마가 넘버원이지! 그 대신 내일 아침엔 다섯 지게 길을께요 어머니! [어머니] (웃으며) 그럼 물항아리를 더 사놔야 되겠구나--- (하며 수챗구멍에다 물을 버린다.) [경재] (손을 씻으며) 항아리값은 우리의 재무장관인 작은 누나가 치르구 핫하--- (하며 아랫방으로 퇴장) [경운] 깍쨍이. (빨래를 짜며) 어머니가 어떻게 물을 길으신다구 그러세요. 아직도 허리를 쓰시기 거북하시다면서--- (방 안에서 휘파람 소리가 흘러온다.) [어머니] 괜찮어--- [최 노인] 참 고약은 다 붙쳤어? [어머니] 예. (허리를 가볍게 치며) 이제 훨씬 부드러워졌어요. [최 노인] 뭐니 뭐니 해도 그 강약방의 처방이 제일이야! 내 청이라면 친형제 일보다 더 알심있게 약을 써 주거든! [어머니] 하기야 이 동네에서 옛부터 사귀어온 집은 인제 그 강약방 하구 우리 집뿐인걸요. [최 노인] 그래 우리가 (과거를 회상하며) 이 집에서 산지가 꼭 사십칠 년이고 그 강약방이 사십 년이 되니까 그러고 보면 나도 무던히 오래 살았어--- 이 종로 바닥에서 자라서 장가 들어 자식 낳고 길러서 이제는 환갑을 맞게 되었으니 [어머니] (마루 끝에 앉으며) 정말--- 근 오십 년 동안에 이웃 얼굴이 바뀌고 저렇게 집이 들어서는 걸 보면 세상 변해가는 모양이 환하게 보이는 것 같아요. 제가 당신에게 시집왔을 때만 하더라도 어디 우리 이웃에 우리 집 담을 넘어서는 집이 있었던가요? [최 노인] 사실이야! 빌어먹을 것! (좌우의 높은 집들을 쏘아보며) 무슨 집들이 저 따위가 있어! 게다가 저것들 등살에 우린 일 년 열두 달 햇볕 구경이라곤 못 하게 되었지! 당신도 알겠지만 옛날에 우리 집이 어디 이랬소? [경운] (웃으며) 아버지두--- 세상이 밤낮으로 변해가는 시대인데요--- [최 노인] 변하는 것도 좋구 둔갑하는 것도 상관하지 않지만 글쎄 염치들이 있어야지 염치가! [경운] 왜요? [최 노인] 제깟 놈들이 돈을 벌었으면 벌었지 온 장안 사람들에게 내보라는 듯이 저따위로 층층이 쌓아 올릴 줄만 알고 이웃이 어떻게 피해를 입고 있다는 걸 모르니 말이다! [경운] 피해라뇨? [최 노인] (화단 쪽을 가리키며) 저기, 저기 심어놓은 화초며 고추 모가 도무지 자라질 않는단 말이야! 아까도 들여다보니까 고추 모에서 꽃이 핀 지는 벌써 오래전인데 열매가 열리지 않잖아! 이상하다 하고 생각을 해 봤더니 저 멋없는 것이 좌우로 탁 틀어막아서 햇볕을 가렸으니 어디 자라날 재간이 있어야지! 이러다간 땅에서 풀도 안 나는 세상이 될 게다. 말세야 말세. (이때 경재 제복을 차려입고 책을 들고 나와서 신을 신다가 아버지의 얘기를 듣고는 깔깔 대고 웃는다.) [경재] 원 아버지 두--- [최 노인] 이놈아, 뭐가 우스워? [경재] 지금 세상에 남의 집 고추밭을 넘어다보며 집을 짓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최 노인] 옛날엔 그렇지 않았어! [경재] 옛날 일이 오늘에 와서 무슨 소용 있어요? 오늘은 오늘이지. (웅변 연사의 흉을 내며) 역사는 강처럼 쉴 새 없이 흐르고 인생은 뜬구름처럼 변화무상하다는 이 엄연한 사실을, 이 역사적인 사실을 똑바로 볼 줄 아는 사람만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수 있다는 사실을 최소한도로 아셔야 할 것입니다! 에헴! [경운] 호--- [최 노인] 아니 저 자식이 아침부터 조밥을 먹었어! 웬 잔소리냐, 잔소리가? [경재] (옷을 털고 일어서며) 잔소리가 아니에요, 이건 웅변대회 때 써먹은 원고의 한 구절이에요! 하--- (경운에게 가서 손을 벌리며) 누나 약속 이행을 해야지! [경운] 아쉰소리 하는 편이 더 권리가 당당하구나? [경재] 노동의 댓가를 받는 것은 당연한 권리 행사죠! [경운] 하지만 고용주가 돈이 없다고 잡아떼면 찍소리 못하더라? [경재] 누가? [경운] 우리 인쇄소에서도 두 달 치나 밀린 월급을 엊그제야 받았지만--- [경재] 그래도 우리 누나는 그런 악질 기업주는 아니신데 뭐--- (하며 언사를 떤다.) [경운] 흠 위험한 비행기! (물 젖은 손을 뿌리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준다) 일찍 돌아와! 골목마다 깡패들이 득실거린다던데--- [경재] 내가 도리어 깡패들의 덕을 봐야 할 형편인걸! 없는 놈은 그런 걱정 없어! [어머니] 말두 말아라. 끼니 먹을 것은 없어도 도둑맞을 것은 있단다. 조심해라! [경재] 염려 마세요. 다녀오겠습니다. (나가려다 말고) 아버지! [최 노인] 왜? [경재] 절 보기 싫으면 중이 나가죠? [최 노인] 그래--- 왜 그건 또 묻는 거야? [경재] (좌우 고층 건물을 가리키며) 저게 뵈기 싫으니 우리가 떠나야죠! [최 노인] 뭐, 뭐라구? [경재] 시외로 가면 후생주택이 얼마든지 있대요. 집 값도 싸고 무엇보다도 터전이 넓어서 화초며 채소는 얼마든지 심어 낼 수가 있을 거예요. 공기 좋고 조용하고 집집마다 맑은 우물이 있고 아주 멋지게 살 수 있대요. [어머니] 참 창용이네도 지금 들어 있는 집을 팔고 그 후생주택으로 옮긴답데다. [최 노인] 그렇게 가고 싶걸랑 따라가 살구려! 난 이 집에서 났으니 이 집에서 죽을 테니까! [경재] (일부러 과장된 표정으로) 고집 폭발이다! 다녀오겠습니다! (하며 급히 뛰어나간다. 이때 대문 안에 아침 목욕에서 돌아오는 경애 등장. 그의 손엔 목욕용 세숫대야며 화장품이 들렸고, 얼굴엔 코울드 크리임이 범벅되어 반지르르 기름이 흐른다. 머리는 핀 칼을 감은 채로다.) [경재] 미쓰 코리아가 돌아오시네! [경애] 까불어? [경재] 도대체 누나는 언제 영화에 출연하는 거요? [경애] 가까운 장래. (하며 마루에 앉는다.) [경재] 혜성처럼 나타난 뉴 페이스 최경애 양인가? [경애] 한국의 킴 노박이다! [경재] 하나님 맙수사! 최 호박이 안 되었으면--- [경애] 아니 이 녀석이! (하며 때리려 하자 소리를 지르며 퇴장) [최 노인] 경재란 놈은 어디 가던 제 밥벌이는 할 거야. (하며 만족한 웃음을 띠운다) [어머니] 좀 경한 편이죠. (경애에게) 웬 목욕이 그렇게 오래 걸리니? [최 노인] 그래도 밤낮 익모초 씹는 쌍판보다는 낫지! 이 집에 오는 누구처럼--- (어머니와 경운은 뜻 품은 시선을 서로 던진다. 경애 손톱에 손질을 하고 있다) [최 노인] 경수 녀석은 어젯밤에도 안 들어왔었지? [어머니] (변명하듯) 어디 친구네 집에서나 잤겠죠--- [최 노인] (성을 내며) 제집과 남의 집 분간도 못 하는 놈이 어디 있어? (하며 담배를 다시 피워 문다) [어머니] 내버려두시구려. 어디 그 애에게 그런 재미도 없어서야 되겠우? [최 노인] 재미? 지금 우리 형편이 재미를 보기 위해서 살아갈 팔자야. [어머니] 그렇지만 마음대로 안 되니까--- [최 노인] 당신은 좀 잠자코 있어! (하고 소리를 버럭 지른다. 경운은 빨랫줄에다 빨래를 널며 눈치만 보고 경애는 재빨리 건넌방으로 들어간다.) [최 노인] 사람이란 염치가 있어야 하는 법이야! 제 놈이 군대에 갔다 왔으면 왔지 놀고 먹으라는 법은 없어! 한두 살 먹은 어린애도 아니고 내일 모레 삼십 고개를 바라보는 녀석이 취직이 안된다 핑계치고 비슬비슬 놀고만 있으면 돼? 첫째로 경운이 미안해도 그럴 수는 없지! [경운] 아이 아버지두--- 오빠인들 속조차 없겠어요? 아무리 일자리를 구할려고 해도 안 써주는 걸--- 사회가 나쁘지, 오빠야 무슨 잘못이에요? [어머니] 사실이에요--- [최 노인] 뭐가 사실이야? 나이 어린 누이가 그 굴속 같은 인쇄공장에서 온종일 쭈구리고 앉아서 활자 줍는 노동으로 벌어드린 쥐꼬리만 한 월급에만 의지하는 것이 사실이란 말이야? 나도 가게가 예전 같다면 이런 소리도 않지. 허지만 골목 안 똥개까지 신식만을 찾는 세상이라 사모관대나 원삼 쪽도리 따위는 이제 소곱장난 감으로 아니 장사가 돼야지! 지난 봄철만 하더라도 꼭 네 벌 장만한다면 또 모르지만 [경애] (화장하던 얼굴을 내밀며) 아버지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최신식 미제 면사포를 사올 테니까요 [최 노인] 네 말은 이제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안 믿겠다! 네가 활동사진 배우가 되기를 기다리다간 엉덩이에 없는 꼬리가 나게 됐어! [경애] 두고 보세요. 오늘은 무슨 기별이 있을 테니까요 [어머니] 경애야 너두 이제 그만하면 바람 좀 잤을 텐데 시집갈 궁리나 해라 [경애] 시시하게 시집이 다 뭐요? 전 시집 안 가요! [최 노인] 그럼 처녀로 늙을 셈이냐? 속 차려! (하며 뒤뜰로 나간다.) [경애] 영화계로 나선 이상 끝까지 이름을 내고야 말겠어요. 오늘 신인 배우 모집 시험이 있어요! [경운] (흥미를 느끼며) 언니 자신 있수? [경애] 구분지 팔십구는 확실해! (하며 신나게 분첩을 두들긴다.) [경운] 어떻게 미리 알우? [경애] (뜻 품은 웃음을 뿜으며) 심사 위원과 미리 언약이 되어 있어 [경운] 어마나! 영화계에도 사바사바가 있어요! [경애] 실력이 넷 고등어가 여섯이면 되지, 뭐! [경운] 실력이라니 언니가 언제 연기 공부를 해봤수? [경애] 영화에 연기가 무슨 필요가 있니? 우선 여배우가 될랴면 마스크가 개성적이면서 아름답고, 육체미가 있으면 됐지, 뭐! [경운] 그렇지만 얼굴만 예뻐도 안된다던데요? [경애] 누가 그래? [경운] 영화잡지에서 읽었어요 [경애] 그야 전혀 연기력이 없는 것도 곤란하지만 역시 용모가 제일이지! (하며 거울을 향해 눈썹을 치켜올렸다 눈을 크게 떴다 한다) [경운] 언니는 용모에 자신이 있으세요? [경애]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심사 위원이 결정할 문제지--- [경운] 심사 위원과 언약이 되어 있다고 했잖아요? [경애] (약간 짜증을 내며) 애가 왜 이렇게 두더지처럼 파고들어? 너 이리 들어와서 허리 좀 졸라매 주려무나! [경운] 또 언젠가처럼 숨이 맥힌다고 기절하실려고? [경애] 잔소리 말고 들어와! (경운 방으로 들어간다. 경애는 몇 벌의 양복을 꺼내서 골라낸다. 그리곤 슈미즈만이 된다.) [어머니] 얘야 누가 볼까 두렵다. 문이나 닫아라! (경운 빙그레 웃으며 문을 닫는다.) [최 노인] (부엌 쪽에서 나오며) 아저 배라먹을 녀석들이 남의 집에다가 구정물을 버리다니 저 저런--- [어머니] 누가요? [최 노인] (좌편 건물을 가리키며) 저 이층 다방에서 버린 물이 뒤안 나무 밑에 흥건히 고였어! 이층에서 내리는 수챗구멍이 터졌나 보군. 망할 자식들! 돈 벌 줄만 알았지 남의 집 망치는 줄은 모르는 모양이지--- 도대체 요즘 녀석들은 염치가 없다니까? [어머니] 설마 알고야 그랬겠어요? [최 노인] 아따 속이 넓기는 동해바다 이상이군. (소리를 지르며) 그래 내 집이 다 썩어가도 설마야? [어머니] 허지만 이웃들이 집터를 높이 돋구어서 집들을 지으니까 우리 집이 낮아서 물줄기가 일로 모여드는 거지 누가 일부러--- [최 노인] 아니 이이가 --- 그래 우리가 잘못이란 말이요? [어머니] (고소를 뱉으며) 누가 잘하고 못하고 있어요--- 우리 집터를 옆집보다 더 높이든지 하지 않은 다음에야 --- [최 노인] 돈, 돈이 있어? 돈이 어디 있어? 장사가 안되어 가게 문을 닫고 세금도 못 내는 판국인데 그래 내 돈 들여서 집터를 돋아 올리라구? [어머니] 누가 그렇게 하자구나 했길래 이리 성화시우? [최 노인] 그럼 워야? [어머니] 낸들 알겠수. 여편네 얘기라면 문풍지 소리로나 아는 당신인데--- [최 노인] (넋두리 외듯이) 나 원--- 일이 이렇게 하나부터 열까지 비틀어지다니 정말 집을 옮기든지 해야지--- 자식 놈이라고 벌어대기를 하는가 장사가 제대로 되는가--- 나 원--- 게다가 가게 문을 닫은 지가 두 달이나 되었는데 무슨 놈의 세금은 세금이야! 설상가상으로 저 빌어먹을 낮도깨비 때문에 화초밭이 망쳐지는 것은 고사하고 집 기둥까지 썩게 되었으니--- 에잇 참! [어머니] (잠시 생각에 잠기다가 노인의 눈치를 봐가며) 여보 영감--- [최 노인] 뭐요? [어머니] 내 생각 같아서는--- (사이) [최 노인] 무엇이 어쨌어? [어머니] 다른 집으로 갈아 잡는 게 상책일 것 같으오만--- [최 노인] (말없이 눈만 부릅뜬다.) [어머니] 애들하고는 여러 번 의논도 했어요 [최 노인] 아까 경재 얘기 말이요? [어머니] 예 [최 노인] 내가 싫다면 안 되는 일이야--- [어머니] 그러니까 여태 말을 못 꺼냈죠 [최 노인] 이건 내 집이라는 걸 알아야 돼 [어머니] 사람이 살기 위해서 집이 있지 사람 죽고 집만 있으면 뭘해요 올세--- [최 노인]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곤 이 집뿐이야 [어머니] 누가 그걸 모르나요. 허지만 이 집을 영영 없애 버리자는 것도 아니고 좀 작은 집으로 같자는 거죠 [최 노인] 이 집은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주신 집이야 [어머니] 그렇다고 자식들이 제 구실을 못하고 기도 못 펴는 꼴을 보고만 있겠어요? [최 노인] 뭐라고? [어머니] 경수만 하더라도 빈손으로 취직을 하자는 것이 틀린 채산이죠. 요즘 세상에 공안들이고 되는 일이 있답데까? [최 노인] 그래 경수 취직 자금을 얻기 위해서 집을 팔자는 거야? [어머니] 그것뿐 아니죠. 경애도 시집보내야겠고 내년이면 경재가 대학에 가야 하고--- 앞으로 돈으로 메꾸어야 할 일이 어디 한두 가지예요? [최 노인] (긴 한숨을 내쉰다) [어머니] 나도 무엇이 좋아서 오십 년 동안 살아온 집을 팔자고 하겠수--- 허지만 참대 같은 자식들을 위해선--- [최 노인] (말없이 일어서 화초밭으로 가서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다.) [어머니] 우리야 이제 살면 얼마나 더 살겠어요. 젊은 애들이 불쌍하지--- (하며 눈시울을 누른다.) (경운이가 어느새 나와 마루에 서 있다. 최 노인은 좌우의 건물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더니 서서히 대문 쪽으로 나간다.) [어머니] 어디 가시우? [최 노인] 내 좀 다녀 오겠소--- [어머니] 그럼 지금 얘기는--- [최 노인] (쏘아붙이며) 생각을 해봐야지--- (하며 퇴장) [어머니] 어휴 저 고집 때문에 이 고생이지 [경운] 어머니 너무 염려마세요. 어떻게 되겠죠. 설마 굶어 죽기야 하겠어요 [어머니] (눈물을 지으며) 굶는 게 두려웁겠니? 사는 일이 두렵지. (이때 화려하게 양장을 한 경애가 방에서 나온다.) [경운] (감탄을 하며) 언니 그렇게 차려놓고 보니까 진짜 배우 같아요 [경애] 언제는 가짜였니? [경운] 김칫국 먼저 마시내요. 호--- [경애] 요 계집애가--- (하며 구두를 신는다) [어머니] 일찍 좀 들어오너라 [경애] 일이 끝나야죠. 참 어머니 오늘 일이 해결만 되면 염려 없으셔--- 이보다 더 좋은 집도 자가용도 그리고 오빠 취직도 만사 오케이로 척척박사일 테니까요 [어머니] 잔소리 말고 시집이나가! 그까짓 것 영화배우를 평생 할 테냐? [경애] 어마나 남의 인격을 무시해도 유분수이시지. 나는 지금 나의 일생을 결정짓는 가장 중대한 인생의 위기에 서 있는 거예요! [경운] 아이--- 언니두 그런 말을 어머니께서 알아들으셔야죠! [경애] (명랑하게 웃으며) 나의 유일한 협력자요 후원인은 경운이 너뿐이구나! 그럼 다녀올게요! [경운] 꼭 합격해야 해요! [경애] 하나님께 기도나 올려 줘. 호--- --- (하며 가볍게 춤을 추듯이 퇴장) [경운] 천성인걸요. 뭐! 좋지 않아요! [어머니] 좋긴 뭐가 좋아! [경운] 명랑하고 솔직하고 자기의 생각대로 직선으로 행동할 수 있는 언니의 성격이 좋지, 뭐예요. 난 언니의 성격을 구분지일 만이라도 닮았으면 해요 [어머니] 그러면 이 어미는 진즉 늙어 죽었을 게다 [경운] 어머니두--- [어머니] 네가 있기에 얼마나 마음이 든든하고 미더운지 모른다--- (한숨) 참 너에게 너무 고생을 시켜서--- [경운] 어머니 그런 말씀하시면 싫어요. 내가 취직을 하고 싶어서 했지, 딴생각은 없으니까요 [어머니] 왜? 너는 대학엘 가겠다고 했지 않았니? [경운] 누구나 한 번씩 해보는 소리죠. 언니도 못 간 대학엘 내가 어떻게 갈 수 있으며 또 집안 형편이 어디 그렇게 넉넉했어요 [어머니] 정말 네가 여학교에 들어가던 때만 해도 괜찮았지 [경운] 지금이라도 오빠가 취직만 되고 언니가 좋건 나쁘건 배우로 뽑히기만 한다면 남부럽지 않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어머니] 그걸 어떻게 믿을 수가 있니? 네 아버지께서 집을 팔겠다고 하시기 전에--- [경운] (사이) 이 집을 판다면 얼마나 받을 수가 있을까--- [어머니] 복덕방 얘기로는 이백오십만 환은 받을 거라고 하더라만--- [경운] 이백오십만 환이요? [어머니] 그래 [경운] 그리고 보니 우리도 아주 가난뱅이는 아니군요? (하며 앳되게 웃는다.) [어머니] 집만 있으면 뭘 하니? 칼은 써야 드는 법인걸--- [경운] 그럼 이백오십만 환으로 후생주택에 들고 남은 이백만 환으로 굴리면 되겠는데요. [어머니] 글쎄 내 얘기가 그 얘긴데도 네 아버지가 그 모양이니 일은 다 틀렸잖니? [경운] 글쎄 제 육감이랄까? [어머니] 육감? [경운] 아까도 어머니께서 말씀하실 때 저 화초밭 앞에서 계시는 모양이 어떻게 했으면 좋을꼬 하시며 망설이시는 눈치 같았어요 [어머니] (쓴웃음을 지으며) 너는 지레짐작도 잘하는구나--- 그러나 네 아버지께서 그렇게만 하신다면 너를 고생 안 시키고도 살 수 있을 텐데! [경운] 저더러 인쇄소를 그만두라고요? [어머니] 그럼 뭣이 좋아서 그런 곳에다 너를 가두어 둔단 말이냐? [경운] 원 어머니두--- [어머니] 아니다. 나는 늘 마음속으로 너에 대해서 얼마나 미안했는지--- 남들은 별의별 사치를 하고 다녀도 그 주먹만 한 돗자리 싸 들고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인쇄공장에 틀어박혀서 일하는 일을 생각하면 내가 꼭 무슨 죄를 지은 것 같기도 했단다. (차츰 울먹거리는 음성으로 변해지자 동요하는 심정을 억제하려고 경운은 불쑥 일어선다) [경운] (토라진 소리로) 남에게 동정을 받고 싶어서 취직한 못난이가 아니에요--- 어머니는 공연히 그러셔! [어머니] 오냐 내가 잘못했다--- 다만 네가 벌어대는 돈만 믿고 사는 게 미안해서 그랬을 뿐이지.--- [경운] 자식이 부모를 위해서 생활하는데 무슨 미안이에요. 글쎄 어머니도 그런 말씀 마세요! [어머니] 오냐 이젠 안 하지! (이때 경수가 힘없이 등장. 발걸음이 약간 휘청거리는 게 아마 술에 취한듯하다. 어머니와 경운은 각각 반가움과 동정으로 맞아들인다.) [어머니] 경수 오니? (경수 말없이 마루 끝에 주저앉아서 후줄근한 저고리를 벗는다.) [경운] 오빠 아침은? [경수] 먹었다. [어머니] 어디서. [경수] 친구 집에서 자고 아침 해장까지 얻어먹었죠. (그의 태도는 어딘지 차고 쌀쌀하며 자포자기적이다) [경운] (일부러 농담조로) 서울 인심은 아니군요? [어머니] (상을 찌푸리며) 술 좀 삼가라. 제 몸을 생각해야지! [경수] 생각 끝에 마신걸요. 헛허--- [어머니] 원 애두--- 참 저 영등포 어느 공장에서 오란다는 얘기는 어떻게 되었지? [경수] 기다리라나요. [어머니] (실망하며) 그래--- [경수] (혼잣소리로) 밤낮 기다리라지! 죽을 때까지 제깟 놈 말만 기다리고 살란 말인가? [어머니] 그렇지만 기다리라면 진득이 기다려 볼 수밖에 없지--- [경운] 요지음 취직이 그렇게 쉽게 되나요. [경수] 그래 네 말대로야! 누구나 하는 소리가 그렇지! 친구고 선배고 겉으로는 아주 염려한다는 표정으로 하는 소리가 매양 그렇지! [경운] (금시 울음이 터지려는 표정으로) 오빠 전 결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에요. 전--- [경수] (허튼 웃음을 지으며) 그래 너만은 내 귀여운 동생은 아니지! 도대체 실업자도 많지만 자기 직업에 대해서 너무 떨고 매어달리는 사람이 더 많은가 봐요. [어머니] 그게 무슨 얘기니? [경수] 옛날엔 싫으면 직업을 바꾼다든가 이 자리에서 저 자리로 옮겨가는 이동이 많았지만 요지음은 그런 사람이 없단 말에요. [어머니] 그래--- [경수] 한번 직장을 붙들면 죽기 아니면 살기로 매어달리니 일자리가 빌 턱이 있겠어요. 못난 자식들! [어머니] 난 또 무슨 얘기라구 흐--- [경수] 그렇게들 직업에 대해서 지나치게 인색하고 공포증까지 품으며 살고 있으니 어디 우리 같은 놈이 첩신이나 하게 되겠어요. [경운] 정말 그래요. 그렇지 않고서는 살 도리가 없으니까요. [경수] 싱거운 친구들! 싫으면서도 싫다는 얘기 하나 못하고 울면서 겨자 먹기로 직업에 매달려 사니 생전가야 우리 몫이 나긴 글렀다. 이 말씀이죠! [어머니] 그렇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온 사람은 좀 달리 봐 쉬어야지--- [경수] (냉소를 뱉으며) 그걸 안다면 세상이 이 꼴이겠어요. 모두가 자기에게 필요할 때만 형님이요 아저씨지 볼짱 다 보면 지나가는 똥개 취급이라니까요--- 핫하. 요컨대는 취직에도 인맥이지! 밑천만 넣고는 어림도 없어! 그러니까 또 취직만 되면 그 본전에다 복리까지 가산해서 주워 잡수시기가 일쑤 아니에요. 그러나 내겐 그 돈도 없어! 돈! [어머니] 아무리 세상이 막되엇기로 그래 인정도 의리도 없단 말이냐? [경수] 인정이요. 에미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애비를 죽이는 판국에 인정이요? 흥?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완서방이 받아먹는 격이죠! 내가 죽어야지! 죽는 것이 가장 편한 길이야! (하며 마룻바닥에 드러눕는다. 어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내려다본다.) [경운] 오빠 방에 들어가서 쉬세요. [경수] 경운아 너는 이 오빠가 밉지? [경운] (일부러 명랑하게) 오빠가 취하셨나 봐! [경수] 내가 취하였다고? 천만에--- [경운] 주정하는 사람이 자신을 가리켜서 취했다고 하는 법이 없다나요? [경수] (크게 웃으며) 네가 벌써 그런 소리를 하게 되었다니--- 이제 시집을 가야겠구나. [경운] 오빠가 결혼하기 전엔 시집 안 갈 테야! [경수] 숫제 남북통일이 되기 전이라고 하는 편이 더 눈물 겨울걸. 핫하--- [경운] (성을 내며) 몰라요. 오빠는 남의 속도 모르고--- 자기만 제일 잘났다는 말씀이신가? [경수] (벌떡 일어나 앉으며) 뭣이? 너 지금 뭐라고 그랬지? (하며 대든다.) [경운] 오빠는 너무 이기적이란 말에요! [경수] 내가 이기적이라고? [경운] 오빠의 심정을 저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어요. 허지만 그런 동정이나 양해만으로 우리가 살아갈 수 있어요? 세상에 부패나 못된 꼴을 한탄하고 비난한다고 우리 생활에 보탬이 되나요? [어머니] 얘 경운아! 너는 오빠를--- [경운] 오빠를 존경했어요! 누구보다도 믿었어요. 허지만 지금은 의심하고 있어요 [경수] 나를 의심한다구? [경운] 오빠! 오빠는 대학 중도에 군문에 들어갔고 이제 제대가 되었으니까, 사회생활에 대해서는 아직 경험이 없으시겠지만 이래 봬도 뭇 남성 여성 사이에 끼여 삼 년 동안 사회 맛을 봐 온 사회인이에요. [경수] 아니 그래 네가 오빠에게 설교할 작정이냐? [경운] 설교가 아니라 의견이지요. 오빠가 제대한 이후 우리 집안은 더 형편이 없고 또 오빠 때문에 집안식구가 얼마나들 괴로워한지 아세요? [어머니] 경운아--- [경운] 어머니는 잠자코 계세요. 아까도 오빠 얘기는 돈이 없어서 취직을 못 한다고 하시지만 그런 말씀 어머니 앞에서는 삼가셔야 되요. 우리 집에 오빠 취직을 위해 쓸 돈이 있으면서 안 냈겠어요? [경수] 아니 내가 언제 돈을 달랬니? [경운] 직접 말을 안 했지만 그 얘기 때문에 마음을 아파해야 하는 사람이 계시다는 걸 아셔야죠! [어머니] (울음 섞인 소리로) 경운아! [경운] (차츰 풀 죽은 소리로) 오빠 우린 이 집을 팔게 될는지도 몰라요. [경수] 그게 나와 무슨 상관있어! [경운] (다시 심각한 표정으로) 오빠는 매사를 그렇게 비뚤어진 생각으로 처리하시자는 게 저는 마음에 들지 않아요! [경수] 뭐라고? 아니, 계집애가 못 할 소리가 없구나. [경운] 저를 때리겠어요? 때리세요. 그러나 그것으로 오빠는 만족하지도 못하실걸요. [경수] 너는 너는 나를 미워하고 있었구나? [경운] 두려웠지요. 요즘 세상에서 가장 말썽을 부리는 문제의 하나가 제대군인이니까요. 오빠가 돌아오셨을 때 저는 우리 오빠만은 그런 사람이 아니기를 은근히 바랐고 또 한편으론 두려워했어요. 길을 가거나 전차 안에서나 제대군인을 보면 저의 마음은 어둡고 쓸쓸해졌어요. 오빠! 아시겠어요? [경수] (혼잣소리로) 내가 그렇게 미웠던 것을--- [경운] 사회가 나쁘고 주위가 무관한 것만을 탓하고 자신의 몸가짐을 아무렇게나 펼치고 다니는 것은 약한 것이라고 봐요! 오빠! 저를 건방진 년이라고 여기시겠죠? 그렇지만 우리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살아야만 하는 거예요! [경수] 나더러 도둑질을 하란 말이야? [경운] 할 일 없으시면 집에 계세요. 다른 제대군인처럼 술 마시고 행패하고 집안사람을 울리지 마세요. 어머니는 오빠 때문에 밤잠도 안 주무신 줄이나 아세요? 어젯밤에도 새벽 두 시까지 안 주무시고--- [어머니] 그만두지 못하겠니? 경운아! (그녀의 뺨에는 눈물이 흐르고 있다. 경수는 멍하니 땅을 내려다보고만 있다) [경운] 오빠가 취직을 안 하신다고 당장에 굶지는 않으니까요. 제가 아직은 벌 수 있어요! [어머니] (애원하듯이) 그래 오늘부터는 밖에 나가지 말고, 집에 있거라. 어쩌면 이 집이 팔리게 되면 조용한 시외로나 옮기자. 넓은 터전에다 채소도 가꾸고 닭이며 돼지도 치며 살자구나! 경수야! 세상이 아무리 막되었기로 제 속을 남에게까지 빤히 펴 보이며 살 필요는 없잖니. 응? [경수] (조용히) 어머니. [어머니] 응? 왜? [경수] 경운아. (사이) 지금 얘기 잘 알겠다. 그런 얘기는 알고도 남음이 있어! 허지만 (차츰 흥분해지며) 뵈기 싫은걸 어떡허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는 걸 어떻게 해! [경운] 그런다고 어느 누가 눈썹 하나 까닥거려요? 오빠 참는 것 뿐예요. [경수] 참아? 기다려? 나중에 보자? 힘을 써 보자? (거의 광증을 일으키며) 그게 나를 병신 취급하는 수작들이야! 나를 놀리는 건방진 짓이야! 부모도 형제도 나를 적당히 놀리고 있는 거야! [어머니] 경수야! 왜 이러니? 경수야! [경수] 어머니 나 술을 먹었어요. 그렇지만 먹고 싶어서가 아니에요. 어머니나 경운 말대로 참기 위해서 그놈들 말대로 기다리기 위해서요! 그러나 참을 수도, 기다릴 수도 없는데 어떻게 해요! 어머니! 나는 불쌍한 놈이에요. (경수, 어머니 무릎 아래 엎드려 운다. 격동하는 심정을 동요를 참으며 어머니는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경운은 돌아앉아 울고 있다. 옆집 공사장에서는 망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온다. 이때 최 노인 등장. 복덕방 노인이 따라온다. 세 사람 제각기 자리를 잡는다.) [최 노인] 자 들어오세요 [복덕방] (집을 둘러보며) 예--- 아주 고가군요. 예--- [최 노인] 우리 선친께서 내가 장가들던 해에 지어주신 집이죠. (기둥을 가리키며) 요즘 이런 재목이 있읍데까? 재목만은 귀물인걸요. (아래채를 가리키며) 저기 방과 헛간이 있구--- 저기가 가게고--- [복덕방] 예--- (기웃거리며) 뒤안으로 돌아가 볼까요? [최 노인] (약간 당황하며) 뒤엔 머 별거 없어요. 그저 나무 벼랑이 있구. (복덕방이 앞장을 서서 들어간다. 최 노인 뒤를 따른다.) [경운] 어머니 내 말이 맞았죠. [어머니] 그러기에 말이다--- 그런데 뒤안을 안 봐야 할 텐데--- 그걸 보면 집값이 여간 깎일 거 아냐(이때 최 노인 복덕방 다시 등장) [복덕방] 많이 손을 봐야겠는걸요 [최 노인] (약간 당황하며) 손 본댔자 그곳에다 고랑을 파고 수챗구멍을 내면 되는 거구--- (화초밭을 가리키며) 여기 이렇게 화초가 있구요--- 집은 괜찮아요. 그리고 무엇보담도 가게가 있어요--- 뿐만 아니라 번지수가 오죽 좋습니까? [복덕방] 번지수야 좋지요만 어디 번지수에서 사나요 집안에서 살지--- [최 노인] 그래 아까 말대로 그렇게 되겠습니까? [복덕방] (마루에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글쎄--- 석장은 어렵겠는데요--- 집이 헐고 저렇게 큰집들 사이에 들어앉아서--- 이건 마치 사람 속에 앉은뱅이가 들어선 격이라서 헛허--- [최 노인] 그래 얼마면 되단 말이요? [복덕방] 잘해야 이백오십만 환--- [어머니] (경수에게) 거봐라--- 내 말이 맞았지! [최 노인] 뭐가 맞았어? [어머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경수] 아버지! [최 노인] (퉁명스럽게) 왜? [경수] 집을 내노시게요? [최 노인] 너는 잠자고 있어! 네가 간섭할 게 아니니까. [경수] 제 생각 같아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보는데요. [최노인] 뭐이? [경수] 담장에 굶어 죽는 것도 아니고 형편을 봐서 두었다 하시죠. 더구나 집 매매란 사정이 급해 보이면 가격을 형편없이 놓는 법이니까요. [복덕방] 아니 그럼 250만 환이 형편없는 값이란말여요--- [경수] 4백만 환도 시원치 않은걸요. [복덕방] 뭐 뭐요? 저 젊은 양반이 정신 있는 사람인가? [경수] 여보 영감님! 여기 종로 한복판입니다 게다가 가게와 살림집이 붙었는데 그래 겨우 250환이라구요? 그런 당치도 않은 거짓말은 공동묘지에서나 하시오. [복덕방] 뭐 뭐요? 공동묘지에서라고? 예끼 버릇 없는놈 같으니라구! [경수] 아니 이 영감님이--- [복덕방] 그래 이놈아 너는 애비도 애미도 없는 놈이기에 나이 먹은 늙은이 더러 공동묘지에 가라구? 이 천하에. [최노인] 여보 김첨지. 젊은 애들이 말버릇이 나빠서 그런걸 가지고 탓달게 뭐요? [복덕방] 그래 내가 집 거간이나 놓고 다니니까 뭐 사고 무친한 외도토린줄 아느냐? 이놈아!나도 장성같은 아들에다 딸이 6남매여! [경수] 아니 제가 뭐라고 했길래--- [어머니] 넌 잠자코 있어! 용서하시우. 요즘 젊은 놈들이란 아무 생각없이 말을 하니까요--- 게다가 술을 마셨다우. [복덕방] 음 이놈이 한낮부터 술 처먹고 어른에게 행패구나! 이놈아!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최 노인] 김 첨지! 글쎄 진정하시라니까--- 내가 대신 이렇게 사죄하겠소 원! [복덕방] 그리고 250만 환이 터무니없는 값이라구? 이놈아, 누군 돈이 바람 맞는 대추 알이라던? 응? 그것도 잘 생각해서야! 음! 이런 분한 일이 있나! [최 노인] 글쎄 참으시고 이리 앉으세요. [복덕방] 난 그만 가보겠소이다. 이런 일도 기분 문제니까요! 다른 사람 골라서 공동묘지 보내구려!애잇.(하며 퇴장) [경수] 제길 무슨 놈의 영감이 저래? [어머니] 네가 잘못이지 뭐니 [경수] 집을 팔지 말라고 했는데--- (이때 최 노인 쌔근거리면서 등장하자 이 말을 듣고는 성을 더 낸다.) [최노인] 이놈아! 누가 집을 판다고 햇어?응? [경수] 아니 그럼 이집을 파시는게아니면 뭐하러 복덕방은--- [최노인] 저런 쓸개빠진 녀석 봤나! 아니 내가 뭣 때문에 이 집을팔아?음 옳아 네놈 취직자본을 대기 위해서?응? [어머니] 아니 그럼 250만환이란 무슨 얘깁니까? [최노인] 네따윗 놈을 위해서 하나 남은 집마저 팔아야만 속이 시원하겠니? 전세로 6개월만 내놓겠다는 거야. [경수] 예 전세라구요?(어머니와 경운은 서로 얼굴을 바라본다.) [최 노인] 왜 아주 안 파는 게 양에 안 차지 이눔아!이 애비가 집도 절도 없는 거지가 되어서 죽는 꼴을 그렇게도 보고싶으냐? [경수] (당황하며) 아버지 아니에요! 저는--- [최 노인] 아니면 껍질이냐? [어머니] 여보 그럼 집을 전세로 줘서 뭣하시게요? [최 노인] 글쎄 아까 어떤 친구 얘기가 요즘 그 실내에서 하는 뭐드라 샤풀이뿔이라든가--- [경운] 샤뽈뽀오드 말씀이에요? [최 노인] 그래 샤뽈뽀오드 말이다! 그건 차리는 데 돈도 안 들고 수입이 괜찮다고 하면서 5가에 적당한 집이 있다기에 그걸 해볼가 하고 이 집을 보였지. 그래 얘기가 거의 익어가는 판인데 글쎄 다 되어 간 음식에 코빠치기로 저 녀석이--- [어머니] 아니 그럼 전세로 250만 환이란 말인가요? [최 노인] 그렇지! 저 가게만 해도 100만 환은 받을 수 있어! [어머니] 그런 걸 가지고 나는 괜히 [최 노인] 뭐가 괜히야? [경운] 아버지께서 이 집을 파실 줄만 알았어요. [최 노인] 흥! 너희들은 모두 한속이 되어서 어째든지 내일을 안 되게 하고 이 집을 나려 버릴 궁리들만 하고 있구나! 이 천하에 못된 것들! (하면 불쑥 일어선다) [어머니] 그럴 리가 있겠어요! 다만--- [최 노인] 듣기 싫어! (화초밭으로 나오며) 이 집안에서는 되는 거라곤 하나도 없어! 흔한 햇볕도 안 드는 집에 뭐이 된단 말이야! 뭐이 돼! (하며 화초밭을 함부로 작신작신 짓밟고 뽑아헤친다.) [어머니] (맨발로 뛰어내리며) 여보!이게 무슨 짓이요! 그렇게 정성 들여 가꾼 것들을--- 원--- 당신도--- [최 노인] 내가 정성을 안 들인 게 뭐가 있어--- 나는 모든 일에 정성을 들었지만 안되지 않아! 하나도 씨도 말야!(경수 말없이 아래 방으로 뛰어가더니 잠시 후 하얀 붕대에 싼 물건을 품에 넣으며 대문 쪽으로 급히 퇴장) [어머니] 경수야! (경운은 입술을 깨물고 섰다) [막] 2막 무대 1전 막과 같음. 전막부터 약 두 시간 후 초저녁 때. 거리에는 아직도 석양의 마지막 숨길이 남아있는 시간인데도 이 집안은 벌써 전등불이 그리워질 만큼 어둡다. 옆집 다방에서는 재즈 음악이 한층 흥겨웁게 들려온다. 막이 오르면 화단 앞에서 최 노인관 경재가 화초며 고추 모를 이리저리 옮기기도 하고 다시 심어 주기도 한다. 최 노인의 얼굴에는 모든 잡념일랑 버리고 화초에만 전념을 기울이려는 열성이 서려 있어 서글프게 보일 정도이다. 좌편 마루에는 어머니와 경운이가 마주 앉아서 물빨래를 손보고 있다. 마루 한구석에 저녁상이 놓여 있다. 어머니는 이따금 밥상 위에 날아드는 파리를 날리면서 화단에서 일하는 두 사람 쪽을 돌아다본다. (경재가 짓밟힌 화초를 쳐들고 그 뿌리가 상했나 안 했나를 살핀다.) [경재] (한 포기의 화초를 아버지에게 주며) 이것도 뿌리는 안 상했으니 심으세요. [최 노인] (풀포기를 받으며) 이게 살아날 수 있을까? 하며 이리저리 살핀다)[경재] 괜찮다니까요--- 우선 심고 보는 거죠! [어머니] (최 노인을 향하여) 이제 그만들 하고 저녁이나 먹읍시다! 경재가 시장하겠수--- [경재] 아버지--- [최 노인] (일을 하면서) 배고프면 너 먼저 먹어라. 난 마자 끌내고 할 테니--- [경재] (불평스러운 어조로) 괜시리 화단을 엉망으로 만드셔 놓고 이 고생이에요? 내 참--- [최 노인] 하기 싫으면 그만두래도! [경재] 그럼, 제 얘기가 틀렸단 말이에요? 이 화단이 어떤 화단이라고 이렇게--- 숫제 다 뽑아 버리시지--- [최 노인] (정색을 지으며) 아니 이 녀석이--- 내가 가꾸어논 화단을 망가치건 살리건 내 마음이야! [경재] 그렇게 만도 볼 수 없지오! [최노인] 뭐라고? [경재] 물론 우리 식구 중에서 이 화단을 만드는데 누구보다도 정성을 들인 건 아버지였지요--- 그렇지만--- [최 노인]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는데 무슨 참견이냐? 이놈아--- [경재] (차근차근히) 아버지 혼자만을 위해서 있는 건 아니잖아요? 애당초부터 아버지 혼자서만 보시고 즐기기 위해서라면 이 좁은 뜰에다 이렇게 고생하시면서 가꾸시지는 안했을게 아니에요? [최 노인] 아니 네 놈이 늙은 애비에게 훈계를 할 셈이냐? (하며 손에 들었던 호미를 내던진다. 그 소리에 어머니와 정운이가 깜짝 놀라며 돌아본다.) [경재] (여전히 빙글거리는 표정으로) 훈계가 아니라 의견이죠--- (호미를 주우며) 아버지께서 화가 나섰기에 그러셨겠지만 형의 처지도 생각해 주셔야죠--- (경수 이야기가 나오자 아버지는 획돌아 앉으며 일을 계속한다.) [경재] 사실 형은 불쌍해요. 군대 가기 전엔 얼마나 명랑한 성격이었어요.(약간 시무룩해지며) 아버진 형이 놀고먹는 꼴이 뵈기싫다지만 놀고 싶어서 놀게 되었나요? [최 노인] (비꼬는 어조로) 전쟁 때문에 망한 사람이 저 하나뿐이라던? 서울 장안에서 제 놈뿐이야! 흥--- 그게다 핑계하는 거야! 할랴고 덤비면 뭣인들 못 해? 연탄집 준식이도 세탁소에 팔용이도 다 전쟁에 갔다 왔는데도 돈벌이만 잘하더라! [경재] 그 사람들이야 국민학교도 안 나왔으니까 무엇이건 벗어부치고 할 수 있지만 형은--- [최 노인] 뭐라고? 이 녀석아! 그래 공부 안 한 사람은 일하고 대학 공부한 사람은 놀고먹으란 법이라도 생겼다던? 응 저런 맹랑한 소리 좀 들어봐? 그래 애비가 너희들 공부시킬 땐 편안히 누워서 학비를 댄 줄 아니? [경읍] (가까이 오면서 험악해진 분위기를 조정하려는 듯) 원 아버지두--- 이번엔 경재하고 싸움이세요 홋호--- 이러다간 또 화단을 짓밟으실 테니 숫제 싸움을 마저 끝내신 다음에 하세요--- 호호--- [최 노인] (손을 덜고 일어서며) 듣기 싫다! [경운] 아버지 제가 뒤처리는 할 테니 어서 손을 씻으시고 진지 잡수세요. (최 노인은 말없이 마루로 간다. 경운은 눈짓으로 경재를 꾸짖는다.) [경재] (속삭이듯) 아버지 고집도 누나의 감언이설엔 맥을 못 쓰는군! 훗훗--- [경운] 아버지 신경을 건들지 말라니까? [경재] 언제는 건들어서 성이 났나? 아버지 신경질은 원래가 자가발전인걸! [경운] (따라 웃으면서) 그럼 자가발전 못하시게 기름을 넣지 말란 말이야--- [경재] (일부러 과장된 동작으로) 예--- 예--- 그저 쩔쩔매겠습니다--- (이 사이에 최 노인은 손을 씻고 마루에 걸터앉는다. 어머니는 마음속에서 꿈틀거리는 우울증을 참가라도 하듯이 조용히 앉아 있다)[어머니] 경재야! 너도 손을 씻어야지. [경재] 예--- (하며 수돗가에 와서 손을 씻으며) 참 큰누나가 합격되었을까? [경운] (웃으면서) 구중 89는 확실하다나? [경재] 언제는 확실하지 않아서 미역국이었나? [경운] (뒷마루에 앉아서 땀을 씻으며) 게다가 심사 위원까지 약속을 했다니까 또 아니? [경재] (수건에다 손을 씻으며) 그런 약속은 천 번이라도 할 수 있지. 도대체 여자가 영화를 해보겠다는 생각부터가 불순하거든! [경운] 예술가가 되겠다는 게 불순해? [경재] 예술? 흥 영화가 예술이야? 틀렸어! [경운] 언니가 들었으면 5분간은 기절하겠다. 얘! [경재] 오늘도 미도파 앞에서 로케하는 걸 봤는데 말이야! [어머니] 뭐? 로케라니! [경운] 홋호--- 영화를 만드는데 길거리에서 사진 찍는 거 말이에요. [어머니] 오--- 난 또--- [경재] 글쎄 백화점에서 나와 택시에 오르는 걸 수십 번 되풀이하잖아? [경운] 되풀이한다고 예술이 아닌가? [경운] 그 되풀이하는 태도가 틀려먹었거든! 무슨 장난이라도 하는지 비실비실 웃으면서--- [경운] 남자 배우야? [경재] 여자지! 그것도 요즈음 인기가 최고라는 스타아가 글쎄 그걸 못하잖겠어? 그러니 한국영화가 외국영화를 따르겠어? [경운] 그렇게 말하는 게 무슨 영화 평론가 같구나? 홋호--- [경재] 장차 일을 누가 알아? 내가 정말 평론가가 될지--- [경운] 그럼 누나는 여배우요 동생은 평론가니, 가관이겠구나! 홋호--- (하면 부엌으로 들어간다.) [경재] 누가 아니래!헛허--- [어머니] 그만저만 지껄이고 밥이나 먹어라--- (경재는 마루에 올라 아버지와 마주 앉는다.) [경운] (쟁반에 국그릇을 들고나오며) 어머니도 올라가세요--- [어머니] 난 좀 있다가 먹겠다--- [경재] 어머닌 저게 틀렸다니까--- 식사란 가족이 함께 먹어야 찬 없는 밥이라도 달게 먹을수 있어요--- [최 노인] 넌 모르는 게 없어 탈이더라--- 사내자식이 무슨 쥐둥아리를 그렇게 놀리냐? 쯧쯧--- [경재] (뒤통수를 긁으며) 그래도 할 얘기는 해야죠--- (네 사람이 상을 둘러앉아 밥을 먹기 시작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숟갈을 들다 말고 우두커니 앉아 있다..) [경운] (딱한 뜻) 어머니--- [최 노인] 왜 또 이래? 응 [어머니] (중얼거리듯) 언제나 온 집안 식구가 한자리에 앉아서 밥 먹는 날이 있을는지! (하며 숟갈을 놓고는 치맛자락으로 눈물을 씻는다.) [경재] 이렇게 바쁜 세상에 어떻게 온 식구가 꼭같은 자리에서 밥을 먹어요? 제각기 적당한 때에 먹는 거지! 어서 드세요--- [어머니] 하루이틀 아니고--- 이렇게--- 어디서 밥을 먹는지--- 죽을 먹는지--- 세상에 복도 없는 자식이--- (하며 흐느끼기 시작한다. 최 노인은 잠시 어머니를 노려보더니 숟갈을 놓고는 돌아앉는다. 그리고 담배를 피운다) [경운] (험악한 용기를 예감하며) 어머니--- 괜시리 눈물 바람이셔! 참 형이 어디 가면 밥굶을까 봐 그러세요? 염려마세요! [어머니] 아침에 그렇게 뛰쳐나갔으니 또어디서 술만 처마시고 며칠이고 뒹굴 테지--- 어유--- 하나님도 너무하셔--- 경수에게 복을 안 내리시면 누가 복을 받는다고--- 어유--- (하며 운다.) [경운] 어제오늘 시작한 일이에요? 게다가 기다려보라는데 있다니까 그러는 동안에 무슨 통지가 오겠죠. [경재] (여전히 밥을 먹으며)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어머니] 지성도 한도가 있지 벌써 몇 달이냐? 이러다간 아주 폐인이 되든지 부랑당이 될 거야--- [경운] 어머닌 왜 그렇게 불행해지는 경우만 생각하세요? [경재] 쥐구멍에도 햇볕 드는 날이 있다잖아요? [어머니] 그렇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인다--- 요즘에 와서는 꿈자리가 사나운 데다가--- 아침에 네 오빠가 나가던 때 눈을 봤지? 게다가 방에서 가지고 나간 것 또 뭐였는지--- [경재] 방에서 뭘 가지고 나갔어요? [어머니] 뭣인지 하얗게 붕대로 감은 것을 가지고 쏜살같이 나가잖겠니? [경재] (젓가락을 떨구며) 하얀 붕대로? [경운] 경재야 너는 아니? [경재] (혼잣소리로) 그거야! 틀림없어--- [어머니] 그거라니? [경재] 어머니! 누가 ! 왜 말리지 않았어요? 네? [경운] 아니 그게 뭔대? [경재] 권총일거에요! [어머니] 뭣이? [최노인] (안색이 굳어지며) 권총? [경재] 형이 가지고 있는 것을 봤아요--- [경운] 그럼왜너는 여태 알리지 않았었니? [경재] 형이--- 불쌍했어요! 아니 형이 권총을 가지고 싶은 심정엔 저도 공감이 갔으니까요! [최노인] 경재야! 자세히 얘기좀 해라! (경제는 안절부절하며 좀체로 말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경운] 경재야!언제 봤지? 그 권총--- [경재] 두달전인가 봐요--- 잠결에 바시락거리는 소리가 나기에 눈을 떠보니까 형이 일어나 앉아서 두얼 만지고 있지 않겠어요? 그래 뭘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형은 몹시 당황하면서 무엇을 트렁크 속에 감추는 것 같았어요. [최 노인] 그래 네가 봤었니? [경재] 그날은 그대로 잠을 잤어요. 며칠 후 공부를 하다가 문득 그 트렁크가 눈에 띄더 군요 저는 남의 물건을 뒤지는 것 나쁜 일인 줄은 알면서도 열어 봤어요--- 그랫더니 트렁크 맨밑바닥에 권총이 붕대에 감긴 채로 숨겨있었어요. [최 노인] 뭣이? [어머니] (와들와들떨며) 뭣 때문에 그런 것을 감추었을까? 응? [경재] 그것 못 봤어. 다만 손에 쥐어보니까 목적한 게 진짜 권총인 것만은 사실이야! [어머니] 어유 저걸 어쩌나? [경재] 그날 밤 형은 술에 취해 들어왔어요. 저는 형에게 그런 걸 왜 가지고 있느냐고 캐물었죠. 형은 처음엔 화를 벌컥 내면서 저를 때리려고까지 하더니 나중에는 깔깔대고 웃지 않겠어요? [최 노인] 웃어! [경재] 예--- 형 얘기로는 그 권총을 볼 때마다 살아 나갈 힘이 생긴다는 거예요. 전쟁터에서 총을 겨눌 때는 적을 쏘아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고 만다는 그런 절박한 상태에서 불평도 불만도 없는 심경으로 돌아간다는 거예요. [경운] 그러니까 그 권총을 가지고 있음으로써 반성하고 자신을 채찍질한다는 뜻이구나? 맞았어! 형은 하루에 몇 번이고 죽고 싶은 생각이 나지만 그 권총을 보면 악착같이 살고싶은 용기가 난다고요--- 최 노인은 길게 한숨을 내쉰다. (어머니는 아직도 떨며 울먹거리고 있다.) [경재] 저는 그 이야기를 듣고 형과 같은 환경에 놓이면 누구나 다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느껴졌지요. 형은 저더러 그 얘기는 비밀로 해달기에--- [경운] 그렇지만 왜 하필이면 그걸 가지고 나갔을까! [경재] 저도 그게 불안해요(사이) 그걸 팔려고 가지고 나갔을지도 모를 일이지만--- (깊은 생각에 잠기다가) 아니야 형은 권총으로 자살을--- [어머니] 뭣이? [최노인] 망할 자식! 자살이라니--- [경재] 그렇지 않고서야 뭣 때문에 가져갔겠어요? [경운] 아버지! 경재말이 옳을지도 몰라요. 그걸 팔 생각이 있었다면 진작 돈과 바꾸었을 게 아니에요? [어머니] 영감이 그 애에게 너무하셨어요! 그렇게 심히 꾸지람 듣기란 그 애로선 생전 처음 당한 일이었을 텐데--- [최 노인] 아니, 이제 와선 내 탓이야? [어머니] 복덕방 이야기만 듣고서 지레짐작을 한 것은 경수 잘못이기도 했지만 그 애는 그 애대로 부모에게 대해 미안해서 하는 소리를 가지고--- [경운] 어머니! 어떻든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오빠를 찾아봐야겠어요--- [최 노인] 어떻게 찾는단 말이냐? [경재] 형이 잘 가는 목노집에 들려보면 대강 눈치를 알 수 있죠! 제가 가 보겠어요! (경재가 뜰로 내리서자 경운이도 따라 일어선다.) [경운] 그럼 나는 오빠 친구네 집을 몇 군데 돌아보겠어--- (경운, 방으로 들어간다. 무대는 전보다 어두워졌고, 배경으로 도시 의 불빛이 또렷하게 나타난다 경재가 대문 가까이 갔을 때 대문 흔들리는 소리가 난다.) [경재] (긴장하며) 누구세요? 형님이요? (모두 긴장하여 보다 아무런 대답이 없다. 경재가 대문을 열어 내다본다. 그러나 밖에 사람은 들어서지 않는다.) [경재] (잠시 살피더니) 큰 누나 아니야? 왜 들어오지 않고 서 있어요? 어서 들어와요! [어머니] 누구냐? (이때 비로소 경애가 서서히 들어선다. 아침에 나갈 때와는 달리 풀이 죽은 모습으로 땅만 내려다보면서 뒷마루에 가서 앉는다. 심상치 않은 태도에 경재는 말없이 바라본다.) [경운] (옷을 갈아입고 나오며) 언니 왔어요? (경애를 발견하자 언니 어떻게 됐수? (경애는 허공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차츰 표정이 이지러지며 마침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흑흑 흐느껴 울기 시작한다. 정운과 경재는 서로 얼굴을 쳐다만 보며 말을 걸기를 망설인다.) [경운] (가까이 가서 어깨에 손을 얹으며) 언니--- 왜 이러세요? [경애] (히스테리칼하게) 제발 나 혼자 있게 내버려두라니까? (뜻밖의 태도에 경운은 멍하니 서 있다.) [경재] (돌아보며) 아니 웬 요란이야? 지금 집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줄 이나 알고 그래요? [경애] 너희들까지도 나를 놀리기냐? 왜들 나만 보고 서있어? [어머니] 경애야--- [경애] (중얼거리듯) 도적놈들! 이 세상에 믿을 거라곤 없어! 모두가--- 협잡군들이야! [경재] (재빠르게 눈치를 차리며) 흥 이제사 알았어요? [경애] 뭣이? [경재] 그러기에 훔치는 도둑보다 도둑맞는 사람을 탓하는 세상이죠!! (경운에게) 그럼 나 먼저 다녀올게요. (하며 대문 밖으로 뛰어나간다..) [경운] (동정의 눈초리로) 언니 그럼 역시 안됐수? [경애] 떳떳이 시험이라도 보고 안 되었다면 덜 분하겠어--- 그런데--- [경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예? [경애] 처음부터 이상스런 예감이 들긴 했었지만 그렇게 감쪽같이 속일 줄은--- 아--- (하며 다시 흐느낀다) [경운] 언니 자세히 좀 말해봐요! [경애] 글쎄 그 영화사라는 게 가짜였구나--- [경운] 예? 가짜라뇨? [경애] 신인 여배우를 모집한다고 선전만 하구 수속금만 몽땅 긁어먹구선 자취를 감추었으니 어떡하면 좋으니 응? [경운] 그럼, 심사 위원은요? [경애] 그 녀석도 한속이었어--- 30명이나 되는 사람이 그걸 모르고 매일같이 문턱이 닳도록 따라다닌 결과가 이것뿐이라니 분하지 않아? [경애] 만 환이란다--- [어머니] 그러기에 내가 뭐라든--- 진즉 마음 잡아 시집이라도 갔으면--- [경운] 어머니도--- 일 잘되기를 바라고 하는 일이었지. 누가 이렇게 될 줄 알았나요? 언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까짓 것 돈 만 환 없어졌다고 어떨라구요? 자 어서 방으로 들어가세요. [경애] (새삼 슬퍼지며) 누가 돈이 아깝다고 했니? 그까짓 돈이 문제가 아니라니까! (하며 허둥지둥 방으로 들어간다 세 사람은 경애의 뒷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다 잠시 후 방바닥에 쓰러지는 소리와 함께 울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경문은 긴 한숨을 뱉으며 서서히 대문 쪽으로 나간다) [최 노인] 말세야--- 말세--- [어머니] (영감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만 좀 덮어 두세요--- 그 애 속인들 오죽하겠수? 원--- [최 노인] 세상이 아무리 변했다기로 하늘이 땅 되고 낮이 밤 되라는 법은 아닐 텐데--- 자식을 믿는 부모가 등신이지! 이제 무슨 꼴이람 어서 죽는 게 상팔자지! 에잇--- (최 노인, 자리에서 일어서 뜰로 내려온다. 어머니는 시름없이 상을 들고 마루 구석에다 놓는다. 이때 대문밖에 인기척이 나며 우체부가 들어선다.) [우체부] 이 댁에 최 경수란 사람 있습니까? [최 노인] 예--- 있기는 있는데--- 왜요? [우체부] 속달 우편입니다--- (하며 펼지를 내민다.) [최 노인] 속달이요? (편지를 받아 눈 가까이 대보며) 이거 눈이 어두워서 보여야지--- 어디서 왔소? [우체부] (대문 밖으로 나가려다 돌아서며) 영등포에서 왔어요--- 안녕히 계셔요. (우체부가 대문 밖으로 나가자 최 노인은 편지를 들로 마루로 와 앉는다.) [최 노인] 영등포--- [어머니] 혹시 취직이 되었다는 소식 아닐까요? [최 노인] 응? [어머니] 아침에 경수 말이 영등포 어느 공장에서도 기다리라고 했다던데--- [최 노인] 글쎄--- 내 안경이 어디 있던가--- 이때 경재가 밖에서 들어온다.) [어머니] 경재야? [경재] 목노집엔 안 들렸다는데--- [어머니] 애 너 편지 좀 읽어보라--- [경재] 편지라뇨? [어머니] 네 형 앞으로 온 편지라는데--- [경재] 그걸 왜 봐요. 남의 편지를 함부로 뜯는 게 아니에요--- [최 노인] 읽으라면 읽어봐 저 녀석은 말끝마다 아는 척이지(하며 편지를 내민다.) [경재] 편지를 받아 뒷면을 보며 ) 광일 제약 주식회사? 영등포에 있는 회사군요--- [어머니] 어서 읽어 봐라(사이) [경재] (편지를 읽다 말고 아버지 되었어요! [최노인] 뭐가? [경재] 형님 취직 말이에요--- [어머니] 정말이냐? [경재] (편지를 읽으며) 귀하를 본사 업무과에서 채용하고자 하오니 오는 30일까지 출사하여주시기 바라나이다--- 어때요? [최 노인] (얼굴에 빙긋이 미소가 떠오르며) 그럼 틀림없군! [어머니] 제약회사라 약 만드는 히사지? [경재] 예 이제 어머니 약은 염려 없겠네요? 핫하--- [어머니] 슥 이렇게 고마울 때가 또 어디 있겠니--- 그러기에 무슨일건 꾹 참으면 되는 거래도--- [최 노인] 참아서 되었나 운이 터져서 된게지--- [어머니] 정말 큰애 취직만 되어도 우리 집의 큰 고질은 나은 셈이죠 (기쁨을 억제하지 못하며)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기뻐하겠수 취직이 안되어 밤낮 서리맞은 호박잎처럼 비실거리더니 이젠 살았어요--- [최 노인] 어지간히 이렇게 일자리 구하기가 고돼서야--- 쯧쯧--- 좌우간 우리도 어떻게 서둘러서 다시 가게를 열도록 해야겠어--- [어머니] 이 집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최 노인] 어떻게 하다니? [어머니] 전세를 내놓으시겠다면 서요? [최 노인] 그건 달리 생각해 봐야겠는걸--- [어머니] 달리 생각하다뇨? [최 노인] (뜰을 이리저리 거닐며) 당신 말대로 작은 집으로 갈아잡아야 되겠소 [경재] 에 아버지 그럼 후생주택으로 들어가는거죠 네 되겠죠 [최 노인] 이녀석아 이손을 놔 [경재] 그렇게 자신의 주견을 고집하다가는 전체의 의사를 위해서는 양보하시는 아량이 있으시니 말이죠 [최 노인] 또 연설이다 헛허--- [경재] 핫하--- [어머니] 그럼 내일부터라도 집을 알아봐야겠네요 [최 노인] 그렇게 해요 그리고 남은 돈으로는 구멍가게라도 차립시다 [경재] 그리고 형님 양복이라도 한 벌 맞추어야죠 [어머니] 네 말이 옳아 의복이 날개라는 말도 있지 않아요. 아무리 속에 듣게 많아도 차림새가 허수룩하면 얕잡아 보는 세상이니까? [경재] (행복감에 잠기며) 그러고 보니 세상은 살고 볼일이에요 이렇게 한가지씩 일이 처리되어 가니 재미있잖아요 [최 노인] 네 형이 취직했으니 이젠 다리 뻗고 자겠다. [어머니] 이제 경애 시집보내고 경재 대학에 들어가면 바랄 게 뭐 있수 경운이는 없으니--- [경재] 참 큰누나는 어디 갔어요? [최 노인] 철없는 것 집 안에서 용이 나는지 불이 나는지도 모르고 잠만자 어서 깨어라 경재야 [어머니] 내버려두세요. 그 애 마음도 생각해 줘요. 그렇게 몸 앓아 다니다가 그런꼴을 당했으니 오죽하겠어요. 울고불고 하느니 보다는 낫지, 내일부터는 개운한 얼굴로 일어나게 내버려뒤요 그렇게 한 번 경을 치고 나가야 마음도 여물어지는 법이니까요--- (이때 대문밖에 웅성거리는 소리 난다. 세 사람은 동시에 그쪽을 돌아본다.) [어머니] 또 무슨 일이 났나? [최 노인] 경재야 나가 보아라--- [경재] 예--- (하며 대문 쪽으로 가려 할 때 다음 말소리가 들린다..) [형사] (소리만) 빨리 들어가지 못해--- 아니 이 자식이--- 왜 안 들어가 응(하면 잠시 비비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대문이 열리며 경수가 들어선다. 그의 손엔 수갑이 채워졌다 경수는 가족들을 보가 재빠르게 얼굴을 돌리며 선다. (형사는 밖에서 몰려드는 사람을 몰아낸다) 그만 들어가지 못해 왜 이렇게 졸졸 따라다녀 어서! (형사의 호령에 왁자지껄하며 사람들이 몰려가는 소리난다 형사는 대문을 닫고 들어선다. ( 최 노인 어머니 경재는 감전된 사람처럼 형사와 경수를 바라보고 있다 무서운 침묵이 흐른다. [형사] (형식적인 인사를 던지며) 영감님이 이 집의--- [최 노인] (일부러 태연하게) 예 이 사람이 주인 인대요--- 어디서 오셨는지--- [형사] (신분증을 내보이며) 저 수사계에 있습니다. 잠깐 조사할 일이 있어서요 --- 경수를 가리키며) 아드님이신가요? [최 노인] 예--- 제 큰애입니다.--- 무슨 잘못이라도 저질렀나요? [형사] (그 말에는 대답도 안 하고) 방이 어딥니까? 좀 들어가 볼까요? [경재] (아랫방을 가리키며) 여기예요 [형사] 응--- (들어가려다 말고 경수에게) 도망치면 재미없어 알았지? (가족들에게 ) 가족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하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어머니] (와들와들 떨면서) 경수야 --- 이게 ---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응--- (경수는 등처럼 서 있을 뿐이다..) [최 노인] (경수 곁으로 나가서며) 누구하고 싸웠니? 응? 이게 무슨 창피냐? [어머니] 경수에게로 바싹 붙으며 속 시원히 말 좀 해라 그렇지 않아도 경재와 경운이가 너를 찾아다녔는데 --- 어디서 무엇을 했기에 이런--- (하며 수갑을 내려다본다. 그러나 경수는 여전히 말이 없다 [경재] 형님 권총은 뭣 하러 가지고 나갔어요. (권총 말이 나오자, 경수에 얼굴에 한줄기 긴장이 스쳐 간다..) [경재] 죽는다고 만사가 해결되나요. 바보같이 죽기는 왜 죽어요. 자살미수라고 신문에 나면 무슨 창피에요? [최 노인] (그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노기를 폭발시키며) 왜 말 못 해? 아가리는 언제 쓰라는 아가리야! 이 천하에 못돼먹은 자식! (하며 경수의 뺨을 친다. 그래도 경수는 입술을 깨물뿐 반응이 없다.) [어머니] 여보! 때리기는 왜 때려요! (애걸하듯) 경수야 제발 말 좀 해라. 이 에미 가슴이 터지고 말겠다! 응? 경수야? (이때 형사가 방에서 나온다.) [최 노인] (형사에게 다가서며) 저--- 선생님 저 녀석이 무슨 죄를 지었나요? [형사] 아직 모르시는군요? 글쎄 어쩌자고 아들을 그런 못된 짓을 하게 내버려둔단 말이오! [최 노인] 무슨 짓을--- [형사] 그보다 아들이 권총을 숨겨 두었다는 것을 몰랐던가요? [최 노인] (경재를 바라보더니) 권총이라니? 전혀 모 모르는 일입니다--- [형사] 몰랐어? 집안에서 그렇게 감독이 불충분하니까 밖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게--- 영감님 아들은 (잠시 사이를 두고 식구들을 훑어보더니) 백주에 강도질을 했어요! [최 노인] 예 ? [어머니] 가 강도요? [경재] 형님! (경수는 두어 발 비틀거리더니 벽에 얼굴을 기대며 돌아선다) [형사] 종로에 있는 귀금속에 들어가서 권총으로 협박 끝에 싯가 3백만 환에 해당하는 귀금속을 절취하여 도망쳤어! [어머니] 경수야! (하며 마루 끝에 쓰러진다) 이게 무슨 소리야? 응? [형사] 그러나 범행 4분 후에 붙잡혔지요. 그러니까 강도 미수범이지요? [경수] 강도가 아닙니다. 두 달만 빌리자고 했어요! [형사] 듣기 싫어! 그걸 말이라고 해? [경수] 정말입니다! 난 돈이 필요했기에--- [형사] 돈을 빌리려면 좋게 빌릴 것이지 무기로 위협하면서 빌려? [경수] 정말 훔칠 의사는 없었어요. 순간적으로--- [형사] 좌우간 서로 가서 다시 취조를 받아! 자 가자! [어머니] (길을 막아서며) 잠깐만--- 얘기를 하게 해주시우! [최 노인] (덥석 주저앉으며) 얘기는 무슨 얘기야 도둑놈하고 얘기를 해? 나가라--- 썩 나가지 못해! [경수] 아버지! 마지막으로 말씀올리게 있어요. 제가 아버님 어머님께 곱게 보이려다가 그만 이 꼴이 되었군요. 저 때문에 이 집을 팔 수도 없지만 그렇게 되는 걸 우두커니 방관할 수도 없는 저였어요. 저는 오늘 아침에 집을 나갈 때는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서 아무도 모르게 죽을 작정이었어요--- [경재] 형님은 천치 바보야! 비겁해! [경수] 네 말대로 나는 철저하게 비겁했었지! 그러나 나 하나 때문에 집안이 헝클어지고 그늘진 것을 모르는 척 할 순 없었단다--- 나만 없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었으니까--- (사이) 그러나 번화한 거리에 나섰을 땐 내 마음은 차츰 변해졌어! 그러다가 보석상 앞을 지나치던 순간의 나는 벌써 엉뚱한 것을 공상했었다, 경재야! 이건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그 순간만은 매력 있는 일이었다. (이왕 죽을 바엔--- ) 이런 생각이 나를 마구 몰아댔다--- [최 노인] 내가---[최 노인] 내가--- 내가 미쳤지, 저런 놈을 자식이라고 믿고 기다리던 내가--- (하며 소리죽여 운다.)[경수] 어머니--- 정말 어머니는 불쌍해요. 나는 어머니 때문에 진작 죽고 싶어도 못죽었지만 오늘 죽으려고 한 것도 실은 어머니 때문이었어요 어머니--- [어머니] 경수야! (하며 경수의 가슴팍을 파헤치듯 몸부림 친다.) [경수] 어머니 우시지 마세요. 저는 이미 눈물도 말라 버렸어요. 제가 없더라도 경재가 제 몫까지, 효성을 바칠 것에요--- [어머니] 아--- 하나님도 변덕스럽지, 하루만 앞서 소식을 주셨어도 아들 하나 살릴 텐데--- 죽은 다음에 의사를 보내면 무슨 소용이람! 아이구--- [경수] 무슨 얘기에요? [경재] (마루 끝에 놓인 편지를 보이며) 취직 통지서가 왔었어요--- 영등포에서--- [경수] (고랑이 채인 손으로 편지를 받아보며) 고마운 친구야--- 그래도 그 친구만은 신의를 지켜주었군--- (발작적으로 웃으며) 나에게 주는 송별 꽃다발 치고는 최고군! 핫하--- (하며 대문 쪽으로 걸어간다. 땅에 떨어진 편지를 경재가 줍는다. 이때 대문이 열리며 경운이가 마치 유령처럼 들어온다. 뺨에는 눈물자국이 남았다. 경운과 마주친 경수는 화석처럼 서서 경운을 응시한다.) [경수] (속삭이듯 그러나 떨리는 목소리로) 경운아! 용서해라--- [경은] 왜 남의 이름을 불러요? 나는 아무 관계 없는 사람이에요? (하며 외면을 한다.) [경수] (입술 가에 심한 경련을 일으키며) 알겠다--- 그렇지! 관계있을 리가 없지--- (뒤를 돌아보며) 어머니--- 경재야--- 아버님을--- (하며 획 돌아서 나간다. 형사가 대문밖으로 나가자, 밖이 어수선해지면서 군중들의 웅성거리는 소리가 난다.) [형사] (소리만) 비켜. 저리 가라니까! 뭘 보겠다는 거야! 저리가! (이 말과 함께 군중들의 운성대는 소리도 멀어지며 골목 안은 전처럼 조용해진다. 차도에서 들리는 기적소리와 이웃 다방에서 울려오는 애상적인 경음악의 부조화음이 유난히도 자극적이다.) [어머니] (대문을 쓸어 안을 듯이) 경수야! 경수! (경운은 말없이 마루로 올라 방으로 들어간다. 최 노인은 마루 끝에 앉아 있고 경재는 땅만 내려다보고 있다. 침묵이 흐른다. 경운의 방에 불이 켜지며 발이 걸린 미닫이문 너머로 경운의 모습이 아련히 보인다.) [경운] (무엇을 발견했는지 놀라 비명을 지르며) 앗! 경재야! 경재야! [경재] 누나! 왜 그래? [경운] 언니가--- (누워있는 경애를 흔들며) 언니! 언니! 정신 차려! [최 노인] 무슨 일이냐? (경재를 급히 방으로 뛰어간다. 그러나 경운의 통곡 소리가 터지자, 어머니가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히며 방 가까이 온다. 경재가 한 장의 종이를 들고나온다..) [경재] 큰 누나가 자살을 했어요--- [최 노인] 경애가? [어머니] 아니 자살을 하다니--- [경운] 죽기는 왜 죽어! 못난이! (하며 방에서 뛰쳐나온다. 그의 손에는 빈 약갑이 들렸다.) 수면제를 먹었어요--- [어머니] 뭐라고? (최 노인은 유서를 읽고 있다. 그의 손은 가늘게 떨린다.) (경애의 목소리) '아버님! 그리고 어머님--- 저는 속았어요. 마음도 몸도 남에게 속았으니 이상 살 수 없어요--- 나이론 면사포를 사드리겠다는 것도 허사가 되었어요---' [최 노인] (유서를 읽다 말고) 아니 이게 무슨 꼴이람! 이렇게 한꺼번에 집안이--- 아니 이게--- (최 노인은 벌덕 일어서며 안절부절못한다. 어느새 어머니는 방에 들어가서 경애의 시체를 안고 운다.) [경운] 아버지 진정하세요--- 네--- [최 노인] 이런 팔자도 있담! 허--- 풀포기만 시들게 하는 줄 알았더니 사람까지--- 아니 이게 정말이야? 경애야! (하며 발광하는 사람처럼 방으로 뛰어들려고 하자 경운이와 경재가 아버지를 안아 말린다.) [경재] 아버지 들어가지 마세요! [최 노인] 놔라! 이놈들아! 놔! 그년의 죽어 넘어진 꼴을 봐야겠다! [경운] 아버지 이러시지 마세요. 언니의 마지막 길을 조용히 떠나게 해 주세요--- [최 노인] 사람 목숨이 그렇게 값없는 것인 줄 알았더냐? 너희들 사남매를 길러낼 때 나는 죽음이란 생각도 못 했는데 너희놈들은--- 아--- 이게 내가 얻은 전부야? (마룻바닥에 주저앉으며) 경수야! 경수야! (하며 비로소 방성통곡한다.) (경재와 경운은 멍하니 허공을 쳐다보고 있고 방 안의 어머니는 더 슬피 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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